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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하단 Apr 01. 2023

여행지 영수증을 딱풀로 붙인다, 블록체인도 그렇다

낮은 해상도로 기억을 소환하다

2019년 봄 신주쿠 여행을 갔을 때 부터였다. 한 손에 들어오는 스프링 수첩에 여행지에서 쓴 돈의 영수증을 붙이고 간단한 메모를 남겼다. 해외 출장을 갈 때까지 그렇게 하진 않지만 국내든 해외든 여행이라고 생각할 때는 영수증을 붙인다. 그리고 난 이 수첩을 3명의 가족 외에는 보여주지 않는다. 가족 외 사람들은 틀림없이 여행경비를 살펴볼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여행의 영수증을 붙이는 의도는 따로 있다. 여행의 순간을 좀 더 명확하게 떠올려 기억해 내기 위함이다. 함께 한 시간과 그 순간으로 인해 바뀐 자신을 기억하기 위해서다.


2010년 프라하 여행을 갔을 때 한 손에 들어오는 작은 수첩에 펜으로 스케치를 했다. 못 그리는 그림에 가는 곳마다 스케치 한답시고 계속 지체하는 아빠를 참아주는 딸과 아들의 배려로 난 여행스케치 기록을 남길 수 있었다. 물론 다른 한 사람은 이해해 주리라 의심하지 않으면서. 10년도 훌쩍 지난 지금도 그때의 스케치를 보며 가족과 함께 한 순간을 기억한다. 스케치한 프라하 성과 시간, 그리고, 그 순간 나의 느낌이 기억나게 도와준다.


물론 사진 찍는다. 사진은 찍고 넘기는 책장 같다. 그래서 아쉽다. 읽은 책의 페이지를 넘기고 스케치 하나쯤 남기고 싶었고 그 순간 지불한 영수증 하나쯤 남기고 싶었다.


기억은 공간과 시간의 도화지에 영혼을 담아둔 작은 액자다. 기억에는 소망, 의도와 목적, 감각이 남긴 느낌 등이 담겨있다. 사진은 기억을 떠 올리지만 기록에 가깝다. 여행의 공간과 시간을 어느새 사진보는 순간으로 가져와 버리기 때문이다. 사진에 비하면 해상도가 턱없이 떨어지는 나의 스케치는 공간과 시간을 가져오기 벅차기에 오히려 지금 순간의 나를 그 때 그 순간의 장소로 초대한다.


여행지 지불 영수증은 “기억 스탬프”다. 초등학교 수학여행간 경주 불국사에서 받은 스탬프와 닮았다. 수학여행 스탬프는 선생님이 꾹 하고 찍어 주신 것이라면 여행지 지불 영수증 스탬프는 내 자신이 나에게 찍어 주었다. 여행 사진은 해상도 높은 그 당시 순간을 생생히 보여주어 오히려 나의 기억을 방해한다면 여행 영수증에는 해상도가 심하게 낮은 작은 정보 몇가지만 남아 오히려 그 순간으로 초대할 수 있다. 기념으로 산 엽서와 피규어, 함께 먹은 튀김우동, 방문한 공원 입자료 영수증은 그때 그 장소로 소환한다. 가격과 한정된 일부 힌트만 주고는 그 외 모든 것을 기억해 내라 한다. 영수증 수첩을 넘기면 또 한번의 여행을 하는것 같은 이유다.


디지털 세계는 세상 모든 사람들의 인생 여행 영수증을 붙여 준다. 그리고, 영수증에 담긴 기억은 인공지능으로 얘기해 주겠다고 한다. 뛰어난 감각 능력과 완벽한 기억력으로 담아내는 세계 모든 얘기를 영수증을 고리로 디지털 세상 속에서 담아 내겠다고 블록체인과 인공지능은 약속한다.


사진이 발명되자 더 이상 사진처럼 그리지 않고 인상주의 예술이 탄생했듯, 블록체인과 인공지능이 등장했으니 인간은 이제 뭐라도 시도할 때가 되었다. 힌트가 하나 있기는 하다. 인상주의 이전에도 이후에도 화가는 물감이란 재료를 사용했듯이 블록체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인간은 화폐와 돈 이란 재료를 사용할 것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 '화폐 인상주의' 같은거 말이다.


2023년 함께한 제주여행에서도 난 80년대 감성으로 딱풀로 영수증을 붙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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