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문으로 당당히 걸어나올지, 쪽문으로 도망치듯 나올지 결정하자
“철학자가 문을 열면 과학자가 길을 만들어간다”는 말이 있다. 동의가 되어 고개가 끄덕여 지는 말이다. 그런데 문을 여는 목적과 어디로 가는 길인지 알아야 문장은 완성된다. 기후재앙 극복을 위한 탄소중립이란 “문”을 여니 이제 모두 그 문을 열고 나와 탄소배출을 감축해서 돈 버는 길을 만든다. 돈을 벌기 위해 탄소배출을 감축하면 탄소중립이 이루어지고 목표가 달성되면 기후재앙이 해결되니, 문을 연 사람도 길을 닦은 사람도 제대로 문장을 이해한듯 보인다. 가정을 하나 해 보자. 수십, 수백년 후 지구에서 탄소중립을 실천해 기후재앙을 극복하고 생존에 성공했다고 가정하자. 탄소중립으로 기후위기를 극복한 인류세 인류로 평가하다가도 판매용 상품처럼 붙어있는 가격표를 하나 발견하게 된다. 생존은 했으나 성공한 탄소중립 실천이 돈으로 출발해 돈으로 끝을 맺은 인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가능성도 높다. 즉, 인류가 연 문도 문 열고 닦은 길도 실은 “돈”일 가능성 말이다.
탄소중립을 뒤집으니 뒷면은 돈이다. 동전의 양면이다. 탄소중립하니 돈이 되니 도랑치고 가재잡는 일거양득인 셈이다. 이보다 좋은 것이 또 있나 싶다. 인류로서는 정말 신의 한수가 아닐 수 없다.
두 문장이 있다. “미래 인류는 지금 순간을 탄소중립을 실천한 시간으로 볼 것이다”. “미래 인류는 지금 순간을 돈 벌기 위해 노력했는데 어쩌다 보니 탄소중립이 달성된 인류세로 볼 것이다”. 앞 문장의 핵심어는 탄소중립이고 뒷 문장의 핵심은 돈이다. 미래 인류가 만약 앞 문장이 실린 교과서를 본다면 그들은 지금의 인류를 목적을 실천해 존경받을 만한 인류로 평가할 것이다. 만약 뒷 문장이 실린다면 그들은 지금 인류를 아이디어가 뛰어난 실리적인 인류로 평가할 것이다. 동전의 양면은 분명 존재하지만 평면에 놓이면 한 면만 보여진다.
부상을 당해 경기를 뛰지 못하는 운동선수가 가장 두려워 하는 것은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다는 현실이다. 병을 앓고 있는 환자도 비슷하다. 부상 선수와 환자가 극복해야 할 것은 현실을 받아들이고 살아갈 길을 찾는 것이다. 그리고 부상과 병에서 회복해 걸어가야할 길이 건강했던 예전과는 다르지만 여전히 살아있고 행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는 것이 어떤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 길을 찾지 못하면 어김없이 무너진다. 기후재앙을 당한 지구도 다르지 않다.
기후재앙을 당한 지구는 예전으로 결코 돌아갈 수 없다. 아름다웠던 지구가 그립지만 어쩔 수 없다. 회복해 병원 문을 나서 예전같이 경기장으로 돌아갈 수 없는 운동선수의 마음에 희망이 싹트려면 새롭게 온 마음을 다해 살아갈 길이 필요하다. 프로선수였지만 운동이 좋아 열심히 했었다면 그는 분명 길을 찾을 것이다. 하지만 돈 벌기 위해 운동선수가 되어 목표를 이루었다면 그는 분명 돈 버는 다른 길을 찾으려 할 것이다. 병원 문을 나서는 운동선수가 걸어갈 길도 좋아하는 일을 할지 돈을 벌지 결정하는 동전의 양면인 셈이다. 어떤 길의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이는가? 철학자의 문 또는 세속의 문을 택할지 결정해야 한다.
기후위기를 벗어나 생존에 성공한 인류도 병원문을 나서는 운동선수와 다르지 않다. 철학자의 문일지, 포장만 그럴듯한 세속의 문일지 선택해야할 순간이 반드시 온다. 기후재앙을 벗어난 후 열어야 할 문은 지금의 탄소중립과 돈으로 만들어진 양면의 세계와 연결되어 있음은 말할 나위없다. 탄소중립을 만들어낸 철학자의 지혜로 다른 문을 열지 또는 돈을 버는 세속의 문을 열지 결정해야 한다. 종이 한 장 차이지만 정문과 편법의 쪽문은 다르고 연결된 길도 상이하다.
철학자가 문을 열고 과학자가 길을 닦았다. 그리고 과학자가 닦은 길 끝에 다시 철학자가 기다리고 있다. 그렇게 그들은 인류의 역사를 함께 했다. 하지만 편법의 쪽문으로 나온 길 끝에서 기다리는 사람은 철학자가 아닌 것은 자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