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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하단 Dec 11. 2023

대학의 기적, 다학제 융합이 가능하다고 믿다(8)

학문 소통 언어인 기호의 다양화

(8) 학문 소통 언어인 기호의 다양화


알려고 노력하면 다학제 융합의 상황을 파악하기 어렵지 않다. 솔직해지면 실상은 뚜렷하게 드러난다. 중요한 것은 분과 학문간 경계층까지 이동하게 하는 것이다. 경계층 너머 다른 분과 학문으로 가 전공을 바꾸는 것은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다른 분과 학문으로 넘어가 그 쪽 전문가가 된다면 다학제 융합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고 이미 살펴 보았다. 이제 경계층에서의 소통이 중요하다는 것은 알겠지만 그래도 여전히 쉽지 않은 난관이 있다. 전문 지식과 자존심으로 무장한 분과 학문 학자들을 경계층 영역으로 초대하는 방법이다. 경계층에서 처음 만나면 여간 불편하지 않다. 경계심 작렬이다. 한시라도 빨리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 경계층 생활이 어렵기 때문이다. 의무 복무로 군대에 가서 말뚝 박는 일이 발생하는 것과 맞먹을 정도다. 그 어려운 초대를 어떻게 가능하게 만들 것인가? 의외로 간단한 해법이 있기는 하다. 경계층에 많은 보상이 있도록 하면 된다. 연구비와 같은 보상도 한 예이지만 자신의 영역에서는 얻을 수 없었던 지식과 예상치 못했던 지혜라는 보너스 라도 좋겠다. 매력적인 보상이 있다면 아무리 고집 불통의 전문 학자라 하더라도 경계층으로 올 것이다. 두번째는 경계층을 수도 없이 많이 만드는 것이다. 분과 학문 따로 경계층 따로 두어서 단단히 마음 먹고 경계층으로의 어려운 발걸음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심지어 분과 학문 내부 곳곳에 경계층이 있도록 학문 영역을 새롭게 디자인하는 것이다. 분과 학문 내에서도 가는 곳마다 경계층이 보이도록 만드는 것이다.


누군가 지키고 싶은 것이 있을 때 굳이 그것을 뺏어 나누어 가지자 설득하지 않는 것이 무난한 출발이다. 대신 소중한 것을 별도로 만드는 거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특정 분과 학문을 전공하고 그 분야에서 자신의 영역이 어느 정도 확고해졌고 분과 학문 내 꽤 높은 랭킹의 저널에도 자주 논문을 발표하는 학자가 있다고 가정하자. 그에게 자신의 분과 학문과 주로 논문을 내는 저널 그리고 주로 활동하는 학회를 버리고 새로운 영역으로 초대하면 그가 그 초대에 응하기 쉽지 않다. 그리고 그런 방법이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 가는데 크게 도움이 되지도 않는다. 무모하게 시작했다가는 자신의 기반을 잃어 버리고 새로운 길을 발견하지 못하기도 한다. 자신의 영역을 유지한채 분과 학문 사이의 경계층 영역을 힘을 합쳐 디자인하는 편이 훨씬 효율적이고 쉬운 길이다. 지금까지는 없었던 새로운 가치가 생기는 보상이 존재하는 곳을 만들면 생각한 것보다 꽤 많은 경계층을 만들 수 있다. 처음에는 분과 학문내 경쟁에서 밀려난 무능한 학자들의 모임으로 오해하던 사람들도 조금씩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다. 물론 이 단계까지 가는 것이 쉽지 않고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한데 임계점을 지나야 하기도 한다.


안정성이 지속가능성 확보의 기반이 되기도 한다. 자신의 연구를 발표하고 지식을 얻는 창구인 지식 인프라의 기존 형태를 활용하는 것이다. 디지털 시대가 오면서 인쇄 출판 형태로 논문을 내던 저널은 디지털화 되어 전자 저널로 변모했지만 기존 프레임을 유지하면서 오히려 지식 인프라의 비즈니스 모델을 확장하는데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과거에는 저널을 구독하여 도서관에 비치하면서 지식을 공유하던 시대에서 지금은 기관별로 저널 접속을 계약하는 형태로 바뀌었다. 디지털 시대 저널은 기관별, 개인별 구독 계약을 통해 몸집을 불리는데 성공했다. 수익모델을 디지털 시대 더욱 공고히 함으로써 지식 인프라로서의 역할이 강화되는 모습을 띄게 된다. 저널이 지식의 상징으로 확장되는 모습 말이다. 부작용도 발생했다. 확장된 지식의 모습은 지식 인프라의 지속가능성을 넘어 권력의 형태로 지식의 다양한 모습을 저해하기 시작한다는 비판이 생기기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저널을 통해 발표되는 상당수의 논문이 전혀 인용되지 못하는, 지식 생산자는 넘쳐 나는데 지식 소비자는 극단적으로 줄어듬에도 불구하고 거대 출판사 중심의 저널 지식 인프라가 유지되는 기이한 형태의 지속 가능성을 목격하게 된다. 저널에 발표되는 모든 논문의 편당 인용횟수의 소수점 이하를 버린 평균은 “0”이라는 것은 이미 많이 알려져 있다. 여전히 저널이 지식 소통의 중요한 인프라 역할을 하고 있지만 굳어져 가는 프레임이라는 사실도 부정하기 어렵게 되었다. 유명 저널에 논문을 출간하는 것이 학자가 가진 능력의 상징이 된 지금 대안을 선뜻 제시하기도 어렵다. 논문 외 자신의 연구결과를 발표할 수 있는 길이 달리 없기 때문이다. 대학의 학점도 비슷한 경우인데, 학점이 무어 그리 중요한가 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대학 수업에서 학점을 이용하는 것은 학점없이 학생들을 수업에 열심히 참여할 수 있게 만들 수 있겠냐는 질문에 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학점 외에는 별다른 소통 기호가 없기 때문이다. 논문은 학자들의 소통 언어, 조금 확대 정의해 보면 기호이고 학점은 대학 수업의 소통 언어, 소통 기호이다. 소통을 한번 하면 시스템이 한번 바뀐다. 시스템이 바뀌면 시스템을 가진 사회가 변하게 된다. 논문을 발표해 소통하면 학문 시스템이 작동하고 해당 학문 시스템을 가진 사회가 바뀌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변화의 출발점인 소통의 기호를 어쩌면 너무 작게 심지어 단 하나만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학문 연구 소통의 언어와 기호가 논문으로만 한정되어 있었다. 논문이 프레임이라, 안전한 물이 수도꼭지를 통해 흘러나오듯 믿을 수 있는 지식이 저널 프레임을 통해 제공되었던 것이다. 지식꼭지를 틀어 지식을 받고 사용료를 내는 식이다. 지식 뿐만 아니라 사회 다른 인프라도 별반 다르지 않다. 전기 에너지도 콘센트라는 전기꼭지를 틀어 사용하고 사용료를 지불한다. 수도꼭지도 단 하나, 지식꼭지도 논문 형식 단 하나, 에너지도 전기꼭지 단 하나였던 것이다. 표준화되어야만 제대로 믿을 수 있는 물, 전기, 지식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표준화의 프레임을 이용한 것이다. 자원과 지식의 제공과 활용 수단이 단 하나 뿐이니 물론 유지하기 용이해 품질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쉽다. 또한 표준화된 품질을 검정하는 기준이 있어 자원과 지식 생산자들의 능력을 평가하기도 용이해 평가하여 순위를 매길 수 있게 되었다. 저널에 순위가 매겨지는 것을 보면 이를 이해할 수 있다. 개별 연구의 가치를 따지기 보다는 연구결과 논문이 어떤 저널에 발표되었는지를 평가 기준으로 삼게 되었다. 프레임을 씌워 효율을 높인 대신 생긴 지불해야 하는 대가이다. 랭킹을 매기는 표준화된 지식의 평가가 생기면 그에 따른 권력이 필연적으로 형성된다. 권력형 지식 공동체 구조는 특유의 지속가능 모델을 만들어 유지하는데 학문 분야에서도 고인물 권력이 존재하는 배경이다.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이 또한 지식 소통이 시작되었었던 출발점으로 돌아가 살펴 보아야 한다. 이미 비대해져 강력한 권력을 가진 공동체에 직접 대항하는, 어쩌면 실패가 예정된 무모한 저항 보다는 현명한 길을 찾아야 한다. 다행히 디지털 시대 길이 한층 다양하게 열리고 있어 지식 소통의 언어, 기호를 얼마든지 새롭게 디자인할 수 있다. 거대한 프레임 질서로 버티는 분과 학문의 지식 권력에 약자가 저항하는 길은 딱 하나 소통의 기호를 다양화 하는 것 뿐이다. 저널 논문 외에도 연구한 결과를 소통할 수 있는 틀을 다양하게 디자인하는 것이다.


수저로 밥 먹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니 금수저, 흙수저가 생기는 거다. 누구나 흙수저 대신 금수저를 가지려 하니 경쟁과 순위가 생기고 이를 정하는 권력도 발생한다. 이런 경쟁과 순위 체계에 저항하는 유연한 길은 밥 먹는 유일한 도구인 수저 체계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수저 없이 밥 먹는 것이 당장은 힘들지만 만약 수저 대신 사용할 수 있는 도구가 생긴다면 금수저가 뭐 그리 대수이겠는가. 디지털 시대 밥먹는 방법은 무한대로 가능해 졌다는 것을 늘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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