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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하단 Dec 12. 2023

대학의 기적, 다학제 융합이 가능하다고 믿다(9)

딱 하나의 언어로 소통하는 세계

(9) 딱 하나의 언어로 소통하는 세계


도구가 딱 하나 있을 때는 그것만 사용할 수 밖에 없다. 어린 시절 동전 모으는 유일한 길은 돼지 저금통이었다. 그러다 처음으로 은행이란 것을 알게 되고 은행에가 나의 이름으로 통장을 만들어 은행원이 예금한 돈 액수를 적고 도장을 찍어준 경이로운 순간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이후 돈을 모으는 방법은 다양해 졌다. 지금 우리가 전기를 사용하는 길은 콘센트에 코드를 꽂아 이용하든지 스위츠를 켜는 것이다. 그 길 밖에 없으니 당연하게 여기는 거다. 만약 디지털 형식으로 다양하게 전기 사용하는 길이 생기면 또 우리는 그런 방법에 익숙해질 것이다. 전기 스위치를 켜고 끈다 외의 다른 방법이 없지만 만약 디지털 기호화되어 전기 스위치를 켤 때 태양광, 원자력, 풍력 전기를 선택할 수 있다고 상상해 보자. 그렇게 사용하면서 하루 이틀 한달 일년이 지나면 그건 전기 사용 스타일이 일상의 언어와 소통기호가 될 것이다. 전기 쓰는 수저가 하나이니 그렇지 다양해 지면 태양광발전 또는 원자력발전이 전기 사용하는 금 스위치라고 아무도 주장하지 않을 것이다.


연구결과가 처음으로 논문에 실려 인쇄본을 손에 쥔 순간을 기억한다. 그곳에 나의 이름이 인쇄되어 있었다. 혹시 구겨질까 조심스럽게 한쪽 한쪽 넘기면서 살펴 보았다. 교수가 된 후 한 동료교수가 나의 첫 논문이 실린 저널이 분과 학문의 저널 분류에서 하위에 랭킹되어 있다고 비판하는 것을 들었다. 논문을 제출할 당시 논문의 체계도 또 논문에 순위가 매겨질 수 있다는 것 조차 몰랐었다. 어찌 되었건 나도 그렇게 저널이란 거대한 권력을 가진 지식 인프라 세상에 발을 디디게 되었다. 이후 소위 말하는 상위 랭킹의 저널에 논문을 싣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분과 학문내 랭킹이 꽤 높은 저널의 공동 편집위원장도 맡게 되었다. 물론 더 높은 곳은 존재했고 그렇게 노력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거기 까지였다. 그러던 중 공동 편집장을 맡아 일하던 저널의 출판사가 다른 분과 학문 분야의 저널이기는 하지만 위안부 할머니를 왜곡하는 램지어씨의 논문을 출간하는 것을 계기로 사임했다. 학자의 논문에 랭킹이 정해지는 연구에 목표가 정해지는 것에 대한 깊은 회의를 가질 때 였지만 사임을 실제 실행에 옮기는 계기가 되었다. 동시에 금수저, 흙수저로 나눠지는 지식 인프라 저널 체계 속 지식 소통 도구로써의 논문에 대한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물론 지금의 논문을 대처할 별다른 대안을 갖고 있지 못하고 특별한 아이디어도 없다. 다만 지금의 랭킹을 조장함으로써 유지되는 저널 권력이 주도하는 논문은 조만간 한계에 도달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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