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적, 친환경”이라 쓰고 오만하다고 읽는다
“생태적, 친환경”이라 쓰고 오만하다고 읽는다
우선 “친환경”, “생태적”이란 말을 하는 순간 환경이 아니고 생태도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친’이란 친하다는 단어는 관계가 소원하다는 반증이고 ‘적’이란 단어는 목적이므로 그곳에 아직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을 드러내는 꼴이다. 즉, 환경과 친하지 않으므로 친해지려고 노력하자고, 자연 유기체를 인간과 별도의 몸으로 보는 까닭에 생태적이란 말은 쓰는 것이다.
화석연료의 대표주자인 석탄과 석유를 사용하는 것은 친환경도 아니고 반 생태적이란 것인가? 물론 자원을 탐욕적으로 이용한 인류를 변호하는 것은 아니지만 또 다른 탐욕의 대상으로 옮겨 가기 위한 전제이면 곤란하다. 태양광, 원자력(최근 많은 유럽국가들이 그린에너지로 분류한), 풍력을 사용하면 친환경적이고 생태적인가? 이런 질문을 하고 올바른 정답을 찾는 과정은 그 자체로 싸움이고 특정 상대방을 전제로 하는 것인듯 보인다.
석탄과 석유, 우라늄과 같은 광물, 그리고 태양빛과 바람을 우리는 자연이라 부른다. 그렇다면 자연은 인간과 어떤 관계를 가지는가? 이런 물질들을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잘 사용하면, 즉 과도하게 탐욕적으로 이용하지만 않으면 자연과 친해지고 소외시키지 않게 되는가?
석탄, 석유, 우라늄, 태양빛, 바람을 잘 이용하면 자연 또는 환경과 친해져 친환경이고 결국 생태적이라는 논리는 받아들이기 힘들다. 이유는 간단하다. 환경을 ‘친환경’으로, 생태를 ‘생태적’으로 보는 순간 환경과 생태를 인간과 떨어진, 소외된 대상으로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젓가락을 손으로 집고는 밥을 먹을 때 젓가락을 이용한 것이지 밥 먹기 위해 “손”을 이용한 것은 아니다. “아니 이 무슨 궤변이야? 밥 먹기 위해 손을 썼는데 무슨 말이야?” 라고 반박할 수 있다. “지금 손을 썼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선생님도 손을 이용했다고는 하지 않으셨지요”. 다른 예를 들어보면 밥을 먹으면 간은 해독한다. 이때 우리는 간을 이용해서 해독했다고 하지 않는다, 대신 몸이 독이 될 수 있는 물질을 없앤 것이다. 밥 먹을 때 손을 쓴 것과는 달리 간이 해독한 것을 의식하고 확인하지 못하지만 무수한 독성 물질을 먹는대도 건강을 유지하고 있는 것을 보면 간이 그 기능을 성실히 수행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사람의 몸은 손과 발, 여러 장기, 피와 대사물질이 어우려져 생명활동을 한다. 몸에는 어디 있는지 어떻게 작동하는지 모르지만 정신도 어딘가에 분명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즉, 물질과 정신으로 이루어진 몸의 요소들이 기능을 한다. 그런데 몸을 가진 우리가 개별 요소를 이용한다고 하지는 않는데 그것들이 어우러져 기능하기 때문이다. 손을 써서 밥을 먹는 것이 아니라 몸과 정신이 그냥 밥먹는거다. 발로 산책하는 것이 아니라 몸과 정신이 산책하는거다. 이제 단언코 얘기할 수 있다. 인간이 자연이라는 것에 동의한다면, “인간이 석유를 쓰는 것은 자연으로서의 인간이 작동하는 것일 뿐이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므로 인류가 석유를 쓰는 것은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자연이 어떤 특정 방향으로 작동한 것이다
그러니 석탄, 석유 에너지로 산업을 일으킨 것은 자원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인간인 자연이 그 방향으로 작동한 것이다. 자연이란 몸의 작동이라면 우린 이미 알고 있다. 우리의 몸을 함부로 굴리면 건강을 잃게 된다는 것을. 즉, 자연인 인간이 함부로 몸을 굴리면 망가지는데 그게 지금 지구란 자연의 모습이다. 태양광, 원자력, 풍력을 잘 이용하면 망가진 몸을 회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자연을 조화롭게 통제하는 인간의 힘이 아니라 지금과는 다른 방향으로 자연이 작동하는 것일 뿐이다. 이를 분명히 한다면 지금과 많이 다를 것이다.
‘친환경’, ‘생태적’이란 단어는 자연을 잘못 이해한 오만한 인류의 모습을 표현한 단어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