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약하면 지속가능하다?
지속가능은 개념이다. 기발하다 못해 잔인한 개념이다. 그럴듯 해 보이는 논리로 무장해 세상을 좌지우지하며 철저하게 착취하는 것이 지속가능 개념이다.
지속가능 개념은 최대한의 이익을 탕진없이 계속해서 뽑아낼 수 있는 방법만 있다면 아무리 가시밭이라도 갈 준비가 되어 있다. 지속가능할 수만 있다면 감시하면서 통제하겠다는 의도가 숨겨져 있다. 그래서 개발과 성장 논리의 첨병을 이끌고 있다. 예를 들어 보면, 지속가능 행복은 없지만 지속가능 에너지는 있다. 지속가능 투자도 있다. 행복은 순간적인 반면 물질이 가져다준 즐거움은 이어진다.
지속가능은 절약의 윤리를 앞세운다. “아껴쓰자” 윤리관을 탄생시켰다. 절약하기만 하면 물질과 이익의 양만 따질 뿐 질을 개념치 않아도 되는 윤리를 인류에게 선사했는데 윤리판단 기준을 아주 쉽게 통과할 수 있는 선물을 주었다. 기후재앙 파멸의 화석연료라도 아껴쓰면 ‘선’이 되어 버린다. 절수형 변기로 똥누면 그 똥은 친환경이 된다는 식의 안심 논리를 제공하는 식이다. 파생된 논리는 악마의 달콤한 유혹 같다. 어떻게 번 돈이라도 잘 나누기만 하면 정의롭다는 면죄부를 준다.
절약 윤리는 감시라는 호위무사를 낳았다. 참 그들 답다. 사회의 선, 다수의 선을 위해 어쩔 수 없다고 하면서 감시의 필요성 배경을 기어코 만들어 내고 만다. 권력 탄생이다. 끊임없이 계도하면서 감시한다. 계몽 전문가와 기관을 만든다.
그들은 또 얘기한다. 책임지겠다고. 다수의 이익 선을 위해 선택된 지속가능 논리 속 탐욕적 자연파괴와 사회 권력에 대해 책임지겠다고 한다. 그들에게는 책임질 강력한 도구가 있기 때문이다. 성문화해 두었다. 책임지고 빠져나갈 문을 이미 가지고 있는데 ‘지배 위치’를 점령한 부류가 가진 특권이다.
이 모든 사달의 출발은 대중이 ‘지속가능’이란 개념을 인정해 준 것에서 출발되었다. 그러니 해결도 간단하다. 지속가능한 것은 자연계 그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단번에 깨달아 버려야 한다. 지속가능을 유독 강조하는 모든 이들을 경계해야 한다. 그렇게라도 출발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