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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하단 Jan 17. 2024

동물권

동물과 '나'

동물권


어린 시절 육교 위 거리의 걸인을 난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그런 나에게 어른들은 두가지 반응을 보였다. 마음이 착하다고 하는 반응이 첫번째이고, 두번째는 그렇게 동냥을 주면 걸인의 자립심을 잃게 만들어 오히려 해가 될 수 있다는 경고였다. 어린 마음에도 어른들의 칭찬 아닌 칭찬에 그렇게까지 기분이 좋아지지는 않았고 잠시 그런 마음이 있다가도 금방 사라졌다. 문제는 두번째인데 경고성 비판은 꽤 오랫동안 마음에 남았던 기억이 난다. “정말 그런가?”라고.


두가지 다른 반응은 실은 시각의 차이였다. 첫번째는 걸인에게 돈을 주는 사람의 시각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며 두번째는 동냥하는 걸인에 관점을 두는 것이다. 즉, 거리의 성자인 걸인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의 마음을 다루는 것과 도움을 주는 대상인 거리의 성자 걸인을 다루는 차이인 것이다.


거리의 성자인 걸인에 대해서 한가지 분명한 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걸인이 존엄한 인간이란 점이다. 이점은 다른 두가지 반응을 보였던 어른들도 이견이 있을 수 없다. 이 점을 분명히 하고 다음 주제를 한번 고민해 보자.


음식으로 사육되는 동물의 문제는 유사하지만 큰 차이를 던져 준다. 첫번째 동물이 저렇게 인간의 음식이 되기 위해 사육되어도 되는가 라고 판단하는 것이다. 이 경우, 동물권의 관점이 동물에게 있고 동물의 시각이 중요시 된다. 기본적으로 동물의 고통을 공감하는 태도를 윤리의식으로 삼는다. 지구생태계에서 누릴 정당한 동물의 권리와 몫을 인간이 빼앗는 것도 모자라 동물을 음식으로 잔혹하게 사육해도 되는지 묻는 것이다. 동물권 환경윤리의 기본적인 태도이다. 이런 이유로 육식을 끊을 수 있는데 이런 채식은 환경윤리 동물권 실천인 셈이다.


두번째로 가질 수 있는 태도는 동물권 환경윤리라기 보다는 자기 자신을 걱정하는 마음이다. 동물에 대해 지금과 같이 하면 인간의 영혼과 정신이 괜찮을까 하는 의문과 걱정이다. 생존을 위한 사냥이 아니라 사육을 통해 동물 음식화의 잔혹성을 용인해도 과연 사람의 영혼에 아무런 지장이 없을까 걱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동물권 환경윤리 영역이라기 보다는 인간 영혼과 정신에 대한 깊은 고민이기도 하다. 만약 이에 깊이 고민하는 사람이 채식을 선택한다면 환경윤리의 실천은 아니다. 참 어렵게 산다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게 어디 마음대로 되는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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