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종위기종 보호와 페스트와의 조화
멸종위기종 보호와 페스트와의 조화
생명 진화의 시계는 차분하게 느렸다. 밥을 아무리 주더라도 그 시계는 속도를 늘리지 않았다. 그러다 진화 시계의 법칙을 뒤집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가축이란 개념이었다. 얼마나 획기적이었으면 찰스 다윈이 발표한 “종의 기원”의 첫 쳅터가 “가축”이었겠는가. 가축이 되지 못한, 인류에게 간택되지 못한 동물은 겨우 생존해야 했고 그나마 대부분 멸종의 길을 걸었다.
동물은 가축과 멸종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듯 보였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다. 가축과 멸종 아닌 다른 길을 택한 동물도 있었다. 인간이 제공하는 보금자리에 자의든 타의든 들어오지 않고 멸종의 길을 걷지 않으면서 보란 듯이 생존하고 있는 동물이 있다. 바로 “페스트”란 존재다.
“페스트(Pest)”는 인간이 제공하는 보금자리를 탈출한 동물이다
페스트는 전염병의 다른 이름 정도로 대개 알고 있다. 물론 그런 뜻도 있지만 인간에게 유해한 동물이라고 정의되기도 한다. 지극히 인간의 관점에서 보고 내려진 정의다. 바이러스, 박테리아와 같은 미생물도 해당하지만 꽤 큰 동물이라고 하더라도 인간에게 유해한 것이면 이에 해당된다. 심지어 인간에게 유해한 식물도 ‘페스트’ 범주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만 “페스트”는 인간에게 간택되지 못했든지 또는 가축이 되길 거부했다. 그들 자신이 선택했든지 자연이 선택했다고도 볼 수 있다. 이유는 깊이 따져 보아야 밝혀지겠지만 결과는 간단하다. 인간에 저항하는 길을 택한 것이다. 그래서 인간에게 유해하다는 이름을 부여 받아 페스트가 되었다. 전염병을 일으키는 미생물, 쥐, 많은 야생동물이 해당되는데 대부분 몸집이 크지 않다. 몸집이 커 인간의 공격에 쉽게 노출되었다면 아마도 멸종 당했을 것이다. 독초, 야생초, 인간에게 쓸모없는 나무 중에서 해를 가할 수 있는 식물도 해당된다.
즉, 세상을 바라보는 특정한 관점을 세계관이라고 한다면 페스트는 인간의 관점에서 이름지어졌다. 페스트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세계관이라는 것이 만약 있다면 페스트는 살아남아 인류에 저항하는 동식물이 된다. 여기서 페스트의 저항이 비록 그들의 의지에서 기인되지 않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진화의 과정에서 보면 저항이 그들 생존의 열쇠였다는 것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인간은 어느 순간에서 부턴가 대지윤리와 환경윤리 측면에서 “다행스럽게도” 멸종위기종의 보호를 외친다. 그것이 결국 인류를 위한 길이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동물권은 자연의 기본권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페스트의 존재를 깊이 이해하면서 제대로 된 대지와 환경윤리를 가지려면 이를 수정해야할지도 모른다. “멸종위기종 보호와 페스트와의 조화”로 말이다. 무너져 내리는 지구 대지의 현상황을 타계할 수 있는 탈출구로 멸종위기종 보호 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페스트와의 조화는 대지를 향한 지평을 넓혀주어 환경 위기에 제대로 대처할 시각을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