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이 만든 정의와 공정에 치여 산다
이성이 만든 정의와 공정에 치여 산다
어린이 책 “Why?” 시리즈가 있을 정도로 “왜?”라는 질문은 우리에게 너무 중요하다. 교육자와 학부모도 학생과 자식에게 “왜?”라는 질문을 늘 하길 권한다. 사물의 이치를 따져야 제대로 공부가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어린이와 청소년 뿐만 아니다. 하루 종일 대화 하면서 상대방에게 듣는 “왜?”라는 질문이 얼만큼이고 “왜?”라는 질문을 얼마나 자주 하는지 가름하기 어려울 정도다. 정말 “왜?”의 홍수 속에서 대화를 이어가는 것은 아닌가 한다.
“왜?”라고 질문하면 안되는가?
아니다. 물론 계속 질문해도 된다. 다만 우린 “그게 뭐죠?”와 “어떻게 된거죠?”와 같은 다양한 질문을 배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봤으면 하는 것이다. 일이 생기면 무엇과 어떻게 보다 최우선으로 왜를 묻는다는 것이다. 이성적으로 이유를 묻기 때문이다. 그래야 똑똑해 보이고 무엇보다 손해를 보지 않을 수 있다. 특히 손해를 보지 않는다는 점이 공정사회에서 지나치게 강조되고 있는듯 보인다. 공정이라는 틀이 온 사회를 뒤덮고 있다. 이 모든 것을 뒤받침해 주는 “합리”라는 것이 있는데 합리를 이성에 기반한다. “그게 공정해?”라고 묻는 것은 그 뒤에 “그게 합리적인거 맞어?”라는 두번째 질문 성격을 띄는 것이 보통이다. 그리고 우리는 공정과 합리가 공평하게 적용될 수 있도록 법이라는 방법을 활용하게 되었다. 그것도 철저하게.
이성은 합리를 만들어 정의와 공정이라는 도덕을 만들었다, 특히 법 도덕을 중심으로
갈등이 생기면 법을, 심지어 잘못을 해도 뉘우침 대신 법을 찾는다. 그게 가장 합리적이라고 믿는다. 잘못을 저질러도 “왜?” 나만 이렇게 과하게 벌을 받아야 하는데 라고 합리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사회의 공정은 그렇게 합리를 따지고 법으로 해결하게 되었다. 공정하지 못하고 합리적이지 않은 행동과 판단도 “왜?”라는 것에서 출발하는 아이러니가 만연하게 되었다. “왜?”에는 또 다른 “왜?”로 대응할 수 있는 합리적인 방법인 셈이다.
합리주의에 대응하는 합리주의…
모든 사물을 “왜?”라고 따져 묻는 인간의 이성은 다른 동물의 공격으로부터 인류를 지켰고 진화의 핵심 역할을 했다. 하지만 그 후 인간이면 모두 동일하냐는 질문이 차별적인 우월성이 있다는 “합리(?)” 개념 또한 발명해 냈다. 우월의 합리는 도덕적으로 사회에서 공정해야 했으니 또는 원하는 공정이 통해야 했으니 법이 필요했을 것이다. 합리의 극단에서 만나는 것은 다름아닌 인간 이성의 이성적이지 못한 불합리다. 이성을 이성적으로 풀기는 힘들어져 버렸다는 말이다. 이제 이성으로 만든 도덕 대신 감성의 도덕성이 추가되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인류는 늘 합리적이었다. 피와 뼈 속 깊이 모두 합리였다. 단 한 순간도 합리주의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아니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니 합리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합리가 필요하다는 웃지 못할 논리가 등장한다.
다르게 배우고 공부해서 하자는 말이 아니다. 이성의 합리를 버리자는 말도 아니다. 그냥 원래 가지고 있던 감성을 느끼자는 제안을 하고 싶다. “왜?”라는 질문과 함께 “저게 누구야? 저게 뭐지?”, “어떻게 된 것일까?”의 질문도 많이 많이 하자고 제안하는 것이다. 합리적이지 않다구요? 그 질문에 합리적인 답을 해 보면, 일상에서 쓰는 대화에서 질문을 추가해 보는 것만으로도 틀 속에 갇혀 버린 인간 이성 합리주의의 여러 부작용과 병폐를 치유할 수 있다면 손해 볼 것도 없지 않겠는가?
“왜?” 라는 질문 보다 “그게 뭐죠?”, “어떻게 하셨기에 그렇게 개성적이에요?”라는 질문을 더 많이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