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리적이지만 합리주의 반대한다, 자아를 중하지만 에고는 아니다
페미니즘은 합리적이지만 합리주의에는 반대한다, 자아를 중히 여기지만 자아 중심의 에고는 거부한다
“당신의 감성은 따뜻합니다”와 “당신은 감성적입니다”는 어떻게 다른가? 누군가 앞의 말을 당신에게 했다면 당신의 여성성을 칭찬한 것이다. 반면 어떤 이가 뒤의 말을 했다면 당신은 이성적이지 못한다는 말을 애둘러 한 것이다. 이를 혼돈하면 합리주의에 번번히 이용당하고 놀림감이 되기 일쑤다. 물론 댓구할 가치도 없는 일이기도 하지만 사회의 고정된 틀이 통하는 세상이니 주의할 필요는 있어 보인다.
여성성은 여성 뿐만 아니라 남성에게도 있는 인격이다
모든 동물을 뭉둥그려 동물권이라고 하지 않고 동물의 개별성을 존중하며 공조하고 공감한다. 하지만 동물권을 주장하고 동물을 보호해야 한다는 의무를 강조하지만 정작 동물 보다 뛰어난 인간 우월성을 갖는 합리주의 틀 속 사람들은 여성성을 갖지 못한다. 능력 부족이고 결핍이다.
객체를 주체와 대비해서 볼 수는 있지만 이런 이분법은 반드시 방편이어야 한다. 법은 임시성 기반위에서만 유효하다. 분리된 자아로 확고하게 고정하면 몸을 벗어난 정신이 마치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되어 버린다. 이런 오류를 범하면 보편, 추상 같은 개념이 현실이 되는 상황이 발생한다. 자아는 상황일 뿐이라는 이해를 늘 잊지 말아야 한다. 상황이 종료되면 주체와 객체, 자아도 모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기억 속 존재를 현실로 생각하면 망상이고 환각이 된다, 최면에 걸리길 원하지 않으면서 자신을 최면상태에 두는 것과 같다. 이성도 상황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도구인데 이 도구가 자아인 것으로 착각하면 자신이 우월하고 애정어린 친절을 실천하는 행위자를 비이성적이라고 판단해 버리는 편견을 갖는 오류를 범한다. 합리주의는 그렇게 추상적 이성 법칙을 내세워 비인간화된 공공 영역으로서의 정의와 권리를 강조하게 되었다
인격적, 특수성, 감성적 등의 단어와 추상, 보편성, 이성 등의 단어를 편의상 대비해서 비교해 보자. 환경윤리와 합리주의를 각각 표현하는 의미를 갖는다. 이런 분류를 하고 보면 앞(환경윤리 측면)은 사적 영역을, 뒤(합리주의)는 공공영역을 마치 대변하는듯 보이기도 한다, 이는 다시 여성성과 남성성을 대변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분명하게 하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는데, 여성성을 개별성/특수성으로, 남성성을 추상성/보편성으로 나눠 이해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개별성/특수성이 여성성의 대변자로, 보편성/추상성을 남성성의 대변자로 보는 시각은 옳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자연을 보편화해서 하나의 추상으로 보는 것과 개별적인 특수성 각각으로 보는 시각은 다르다. 동물권이라고 해서 동물의 존재들을 뭉뚱그려 보는 것과 개별 동물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갖는 것은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요약하면 합리성을 앞세워 감성이 만들어낸 친절, 공조, 공감을 비이성적인 나약함이라고 치부하는 우월성을 거부하는 것을 모든 생명이 가질 수 있는 페미니즘의 기반이라고 이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