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 환경은 시스템 외부를 맴돌며 늘 안타까워 한다
자본주의의 호위무사는 시스템, 시스템은 중앙집중을 지향하는 권력과 통한다
싫든 좋든 자본주의가 우리 사회의 질서가 되었다. 사회 질서로 오인하는 것이 있는데 소득 분배, 복지, 교육 정의 등이다. 이는 사회 질서가 아니고 정부의 강력한 권력으로 이룰 수 있는 정책이다. 사회 질서인 자본주의 경제에서 생산되는 여러 가치가 정책으로 연결되는 것이지 정책이 질서를 형성한다고 판단하는 것은 착각이다. 어려운 이론과 이데올로기를 가져와 증명하지 않아도 세상과 사회가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자본주의와 정부 정책은 호위무사가 각각 지키는데 시스템과 권력이다. 시스템은 언어란 무기, 권력은 중앙집중이란 무기로 무장해 있다. 자본주의와 정부 정책이 왜 굳이 호위무사를 두는가? 만만치 않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와 정부 정책을 공격하는 선봉을 환경과 대중이 각각 맡고 있다. 시스템을 견제하는 것은 환경이, 중앙집중형 권력에 맞서는 역할은 대중이 맡은 것이다.
자본주의 질서의 병은 착취, 정책의 병은 차별을 통해 생겨난다. 착취와 차별은 자본주의와 정부 정책을 지키는 시스템과 권력에서 비롯된다. 호위무사 역할에 심취해서 지키는 대상, 즉, 자신의 주인을 병들게 한 것이다. 병들게 한 원인이 어떻게 치료까지 하겠는가. 치료해줄 수 있는 실마리는 역설적이게도 공격을 일삼던 적으로부터 발견된다. 예전 조선시대 왕을 독살할 때 사용하던 비소란 독이 적당량을 쓰면 병을 치료하는데 쓸 수 있는 것과 비슷하다. 사회의 환경이 자본주의 병을 고치고, 대중이 정부 권력을 견제하는 이치다.
환경은 시스템에 끼지 못했다? 최소한 정의는 그렇다는 것이다. 물론 끼지 않은 것인지 합류하는 것을 거부 당했는지는 살펴볼 일이기는 하다. 대중도 환경과 많이 닮았다. 권력의 중심 또는 안락함 속에 편입되지 못한 것인지, 편입되기를 거절한 것인지는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지만 어쨌든 대중은 권력의 주위에 머물며 권력을 견제한다. 권력은 늘 시스템을 강조하고, “어디서 듣던 얘기죠!”, 대중은 환경과 가까운 것을 보면 이해가 된다.
환경과 대중은 또 다른 닮은 점을 갖고 있다. 언어가 그것이다. 환경의 언어는 시스템의 언어와 다르듯 대중의 언어는 권력의 언어와 다르다. 환경이 시스템의 언어를 사용하는 순간 더 이상 환경이 아니며 대중이 권력의 언어를 쓰면 더 이상 대중일 수 없다.
한 예만 들어본다. 권력과 시스템의 언어인 “명품”을 환경과 대중이 쓰는 순간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린다. 권력의 “말”과 “대화의 언어”, “소통 코드”를 자꾸 섞어 사용하면 큰 일 난다. 알게 모르게 물든다. 근묵자흑 된다. 그럼 정말 밀려난 환경, 소외된 대중으로 추락한다. 환경과 대중은 단 한번도 밀려나 추락해서 된 존재였던적 없었다. 정체성, 철학, 자존심 하나로 버텨 왔음을 분명하게 기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