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생태학
먹잇감차별, 음식평등
사회 생태학 관점을 이해하다
생태학을 잘못 이해하는 것 중 대표적인 것으로 동물을 음식으로 보는 것에 무조건 반대한다고 보는 것이다. 실은 아니다. 생태학자도 고기를 먹을 수 있다. 즉, 모든 생태주의자가 채식주의자는 아니다. 심지어 사냥을 한 꽤 유명한 생태학자도 있었다. 하지만 생태주의자, 특히 심층 생태주의자라면 자신도 언제든 다른 생명체의 먹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고 받아들인다. 자신의 몸도 특정 상황이 오면 먹잇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심지어 감각한다면 당신은 심층 생태학자의 충분한 자격을 갖추었다.
밀림에서 호랑이에게 공격 당하고, 늪지에서 악어에게 잡아 먹이는 사람은 호랑이와 악어의 먹잇감이다. 야생의 세계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더 이상 흔하지 않고 그런 경우가 벌어질 수 있는 야생 국립공원 지역이 있더라도 야생동물의 먹잇감이 될 수 있다고 하면서 무모하게 자신을 노출시키지는 않는다. 그런데 꼭 야생 호랑이와 악어만 인간의 몸을 먹잇감으로 보지는 않는다. 코로나 바이러스만 해도 그렇다. 코로나 바이러스 생명체가 인간의 몸을 숙주로 이용하면서 인간과 공생을 목표로 하지는 않는다. 자연 속에서 자신이 살 곳을 그냥 찾는 것이다. 야생이다. 즉, 먹잇감으로 알고는 공격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결과적으로는 인간의 몸을 먹잇감으로 공격하는 것과 진배없다. 인간도 먹잇감이 될 수 있다는 야생 상황을 코로나는 극명하게 증명해 주었다. 보이지 않는 포식자의 공격을 제대로 받은 셈이다.
생명체인 동물을 음식으로 함부로 다루지 말자 라고 하는 동물보호와 생태학은 같은 듯 다른 말을 한다. 그렇다고 내가 언제든 먹잇감으로 음식이 될 수 있으니 앞으로 동물을 음식으로 보고 함부로 대해도 된다는 뜻은 당연히 아니다. 비슷한 행동으로 귀결된다고 하더라도 관점이 매우 다를 수 있다. 동물보호주의자의 환경윤리와 생태학 관점의 환경윤리는 그 끝이 비슷해도 관점에는 차이가 있다. 22대 총선을 앞두고 정치철학적 관점은 다르지만 의석 확보라는 목적이 같으면 뜻이 같다고 하면서 합치는 정치계가 연상된다.
생태학 관점을 사회 속으로 가져와 계급, 성이라는 단어를 살펴보자. 계급투쟁이라고 하는 순간 계급을 인정한다는 곤혹스러운 상황이 되어 버린다. 여성 평등이라고 말하는 순간 여성, 남성을 구별하게 된다. “그럼 어쩌겠나?” 라고 하겠지만 계급도 순간, 여성도 순간의 시간 속에서만 그렇게 분류된다는 점을 기억하고 이해해야 한다. 노동자 계급, 자본가 계급은 다음 순간 순식간에 뒤바뀔 수 있다. 여성은 다음 순간 언제든 여성 아님, 비여성, 여성초월의 존재가 되고 때론 남성이 될 수 있다는 이해가 필요하다. 남자와 여자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남자가 모두 남성이고 여자는 모두 여성은 아니기 때문이다. 말 장난, 언어 유희가 아니다. 그것이 생태학의 근본 이해 관점이다. 노동자는 언제든 자본가가 될 수 있는 산업 경제사회, 디지털 세계를 살고 있는 현대인에게 더욱 그렇다. 이 말은 노동자 계급 투쟁은 할 수 있으나 다음 순간 언제든 자본자 권익 보호 운동에 참여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동물을 먹는 인간이 다음 순간 보이지도 않는 미생물 생명체의 먹잇감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심층 생태학이 급진하다고 알려져 있는 배경에는, 모든 이론의 근본적인 밑바닥 기초를 닦는 생각과 닿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우리는 자연이라고 부르며 우주 섭리라고 하기도 한다. 우주와 자연이 인간을 볼 때 만물의 영장으로서 확고하게 고정된 위치의 확보를 허락하지 않는다. 언제든 먹잇감으로 전락할 수 있다. 모든 생명체에게, 먹고 먹히는 정글같은 야생이 평등하게 주어진 것이 자연이다. 인간의 몸도 언제까지나 위대한 생명체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에너지가 고여 잠시, 그 순간 만큼만 다른 생명에 비해 큰 힘을 발휘할 뿐이다. 인간의 몸도 에너지가 잠시 동안 고인 장소에 불과하다. 다음 순간 에너지가 어딘가로 흘러 사라지면 언제든 보잘것 없는 음식과 부스러기로 변한다고 깨달아야 한다고 자연과 생태는 분명하게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