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하단 Jul 22. 2024

플라톤이 정의한 노예

으뜸 노예도 노예!

플라톤이 정의한 노예


자신의 행동을 조절하려는 목적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노예라고 플라톤은 경계했다. 다른 것에는 그냥 관심없고 직장에서 돈 벌어 자신과 가족만 괜찮으면 된다고 생각한다면 평범하고 선량한 국민임에는 틀림없지만 안타깝게도 플라톤에 의해 어떻게 분류될지 분명하다. 이런 선량한 노예로 사회가 구성된다면 노예를 부리는 권력자가 반드시 생겨난다. 노예를 자청했는데 주인되겠다는 자들이 어찌 생기지 않겠는가. 누군가 행동을 조절하려는 자가 있으면 통제하려는 결과를 보고 판단해서는 안된다. 결과가 아니라 조절 의도 자체에 두려움을 느끼는 본능을 발휘해야 한다.


산업사회의 대표적인 프레임 중 하나인 효율은 노동의 분화를 필요로 하는데 분화된 일을 담당하는 노동자는 자신의 일에 대한 목적을 갖기 쉽지 않다. 아니, 허락되지 않는다. 그래서 자본가 또는 국가에 의해 갑자기 국가 성장의 일꾼으로 점프하는거다. 이를 인정하는 것이 자신을 조종해 노예로 만들려는 자들의 편에 서서 스스로 노예화하는 것이라면 곤란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를 거부하면 직장을 구할 수 없고 효율이라는 프레임을 대체할 수 있는 목적을 만드는 것도 결코 쉽지 않으니 진퇴양난이다. 생활은 이어가야 하니 플라톤의 노예 상태에 머물면서 훗날을 기약하려니 플라톤 식 노예적 삶이 고착화 되어 버릴까 두렵다. 의례 그런가 보다 하는 분위기가 개인을 넘어 사회 차원이 된다면 되돌아가기도 힘들다. 그래서 노예가 아닐 수 있다고 믿는 유일한 길인 돈에 집착한다. 돈이면 조종당하지 않을 힘을 쥘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돈이 실제로 많은 것을 해주는 것은 사실이다. 다만 플라톤이 정의한 노예를 다시 떠 올려야 한다. 나의 행동을 조절하려는 목적을 가진 자가 돈이면 어떻게 되는가? 결국 같은 곳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큰 총검 위에 줄서서 작은 총검이라도 차려했던 것이다. 일제 시대, 군부독재시대 완장을 찬 삐에로가 되려 했던 것이다.


조종하려는 권력자들에 맞선다는 이유만으로 반사회적 성향이 곧바로 선해지지 않는다. 권력에 맞서는 자가 권력의 논리와 다르지 않은 정신으로 무장한다면 약자라는 이유만으로 선한 존재가 되지 못한다. 조정하려는 자들 못지않은 병폐를 가졌기 때문이다. 노예를 벗어나려 또 다른 노예를 만들어서야 되겠는가.
매거진의 이전글 긴 총검 옆에 차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