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이 된 돈
피아니스트에게 피아노는 자신의 다른 모습인가 또는 자신의 예술을 표현하는 도구인가? 답하기 전에 다른 질문 하나를 미리 던져두자. 돈을 쓴 사람에게 돈은 자신의 또 다른 모습인가 아니면 그저 지불 수단에 불과한가?
피아니스트에게 연주회를 부탁했을 때 스타인웨이를 요구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예술가 그것도 피아니스트가 그렇다면 분명 스타인웨이 피아노와 다른 피아노 음의 차이가 분명 있을 것이다. 그렇게 믿는다. 수많은 연주와 감상 그리고 피아노를 둘러싼 지식이 스타인웨이라는 명품 피아노 속에 녹아 들어가 있고 이를 피아니스트는 감지하는 거다. 이번에는 피아노를 막 배우기 시작한 부잣집 아이가 스타인웨이를 도레미 단계에서부터 사용한다고 가정하자.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다만 앞에서 피아니스트가 말하는 그런 종류의 음과 기능을 감지하지 못하는 초보자가 명품 피아노를 쓴다고 배움에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다. 피아노를 배우는 곳에 우연히 스타인웨이 외 다른 피아노가 없어 어쩔 수 없이 활용할 수밖에 없다면 몰라도 처음부터 이를 고집하는 것은 아무래도 납득하기 어렵다. 명품은 명품이 된 시간과 함께 한다. 즉, 일이 일어난 환경과 인물이 사물과 함께 한 것이다. 명품이 쓰일 만한 필요하고도 충분한 이유와 배경이 분명 있다. 명품 피아노 건반을 눌러 그 소리의 맛을 느낄 수 있는 사람에게만 필요한 도구다. 그 때 그 도구는 연주자의 인격이 되고 자신의 모습으로 바뀔 수 있다. 명품을 가지고 싶은 순수한 예술가의 마음을 어렵지 않게 이해한다. 다만 명품으로 영혼에 최면거려는 사람들의 탐욕이 명품의 시간을 오염시키고 명품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을 도모하려는 목적을 단번에 파악할 수 있는 명품 판단력도 필요하다는걸 우린 경험하고 있다.
명품의 품질은 그만한 댓가를 치른다. 스타인웨이가 피아니스트 영혼과 합치 된다고 하더라도 대상이 되고 스타인웨이 고유번호같은 것이 부여되면 가격이 생기고 이제 돈으로 거래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걱정되는 것은 스타인웨이 명품 피아노에는 명품에 걸맞는 시간이 녹아들어가 있지만 돈은 그렇지 못하다는거다. 그런데 이런 의문도 생긴다. 스타인웨이 명품 피아노의 브랜드를 지우고 피아니스트라도 알아 차릴 수 없도록 표식과 형태를 없앤다고 가정해 보자. 이제 피아스트가 피아노를 연주해 소리를 확인하기 전에는 명품 피아노인지 알 수 없다. 이제 돈의 존재와 비슷해 졌다. 좋은 돈, 나쁜 돈 따로 없지만 누군가 돈을 선한 목적으로 사용하면 좋은 돈이 되고 범죄 도구를 구입하는데 사용하면 나쁜 돈이 되어 버린다. 겉모습으로는 알아 차릴 수 없어 연주해 봐야 드러나는 명품 피아노와 돈은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돈은 경제소통의 도구이다. 소통의 도구이니 언어이기도 하다. 편견없이 교환하는 도구이기 위해 어떤 종류의 돈 품질 마크도 표시하지 않는다. 아무런 표식과 시간이 담기지 않은 돈은 그만한 배경이 있고 많은 장점을 가진다. 다만 살짝 시간이 드러나는 돈을 상상해 보니 스타인웨이를 연주하는 예술가의 영혼이 떠 오르는 것은 나만의 착각일까?
돈을 사용했을 때 발생하는 의미와 가치 전달과 교환의 성격이 다르다면 무조건 많이 가지는 것으로 족했던 돈은 달라지지 않겠는가? 여전히 장을 보고 여행을 갈 수 있는 돈이지만 그 돈을 사용하는 사람의 시간이 표식된다면 세상은 어떻게 변화할까? 말 한마디로 천냥 빗을 갚는다는 우리의 속담이 현실이 되는거다. 스타인웨이와 문구점에서 파는 건반 장난감 사이에는 수많은 피아노가 있듯 돈도 그렇게 될 수 있다. 돈은 뜻을 전달하는 언어이고 의미를 교환하는 기호이다. 돈, 언어, 기호는 그렇게 다른 것이 아니다. 옷만 다르게 입은 매개이다. 이 속에 소통의 순간들을 담을 수 있다면 돈의 양으로 결정되는 세계 최고 부자 순위, 대학 순위, 학점으로 정해지는 등수 등의 경쟁이 무색해 지는 다른 기호가 만들어 질 수 있는 가능성이 보인다. 무더위에 고생하는 한 학교의 교실 수업에서 학교 지하 공간의 시원한 바람을 떠 올린 한 학생이 친구들과 함께 지하와 교실을 연결하는 관을 설치하고 지하로부터 교실로 시원한 바람을 가져왔다. 아이디어를 내고 실제로 시원한 바람을 가져온 노력을 한 사건을 선생님과 같은 학교 학생들만 기억하는 것이 아니다. 시원하게 공부할 수 있게 된 학생들은 시원한 바람을 가져온 친구에게 마음을 담아 ‘돈’을 보낸다. 그런데 이 돈은 지금 우리가 쓰는 현금이 아니다. 비슷하지만 다르다. 의미와 감사 그리고 어려움을 함께 극복한 시간이 고스란히 담긴 명품 돈이다. 아이디어를 생각하고 함께 관과 송품기를 설치하는 과정, 지하실 바람이 교실을 식히는 순간의 학생들의 환호와 평가들이 고스란히 이 돈에 기록될 수 있다. 기록은 기후재앙으로 야기된 폭염 속 교실과 기억된다. 오랜 시간이 지나 비슷한 어려움을 겪는 한 도시 기후변화 극복 프로젝트 적임자를 찾을 때 상황이 실린 기록은 명품 돈이 되어 사회의 기억으로 전달되는 것이다. 아이디어를 낸 학생은 프로젝트 책임자로서 일하게 된다. 학교는 말과 글, 의미를 상황 속에서 담는 기호를 교환하고 축적하는 장소라고 새롭게 정의될 수 있다. 꼭 교실을 갖는 학교가 아니라도 상관없겠다. 명품 기호가 형성되고 기억되는 기호 장터가 곧 학교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