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의 대화
건축물은 자신의 몸을 인간 소통의 도구로 제공한다. 몸의 구석구속을 소통의 기호로 사용하는 것을 허락함으로써 건축은 가장 독특한 형태의 창의적인 대화를 가능하게 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소통을 살펴보면, 축구선수는 축구공을 주고 받으며, 식물과 흙은 질소라는 영양분을 주고 받고, 경제는 돈을 주고 받으며 소통한다. 이 예에서 알 수 있듯 소통하는 행위자에 비해 소통의 도구는 크기가 상대적으로 작은데 건축물은 행위자보다 훨씬 큰 특징을 갖는다. 하지만 건축 공간을 도구로 소통한다는 관점에서는 다른 예들과 다르지 않다. 건축물 공간은 소통을 통해 의미를 전달하지만 자신은 그대로다. 물론 조금 마모되고 시간이 흐르면서 헐고 부숴지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도구의 역할은 유지한다. 경제활동을 한다고 돈이 변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건축물을 도구로 소통하는 사람들의 집합체가 끊임없이 변하게 도와준다. 언어가 없어도 오히려 가능한 소통 공동체의 모습이다.
성당에 들어가면 건축가의 의도에 부지불식간에 걸려 들고 만다. 성당에 발을 들이는 순간 고개를 들고는 경건한 마음에 빠지기 때문이다. 신과의 대화를 이렇게 유도한 것이다. 유럽 어디를 가더라도 만나게 되는 성당에서 이를 어렵지 않게 경험한다. 그런데 가우디가 디자인한 성당은 여기에 하나를 더한다. 고개를 들고 본 광경에서 발견한 성스러움에 급히 고개를 숙이게 만드는 다른 건축가의 성당과는 다른 모습 하나를 발견한다. 신과 인간이 만나는 조우의 순간, 다른 존재 하나가 그 경계의 영역 속으로 초대된다. 그것은 자연이라 이름 붙여진 알 수 없는 존재인데, 초월의 존재와 인간이 겹쳐지는 경계 공간으로 그야말로 자연스럽게 들어온다. 인간이 도달하기 불가능한 신이란 위대한 법칙에 인간이라면 누구나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존재인 자연이 건축공간 속으로 들어와 있음을 가우디 건축에서 발견한다. 무수한 책의 텍스트에서 묘사하길 시도했지만 드러나지 않았던 자연이란 존재의 모습이 가우디 건축에서 비로소 발견된다. 예술이 허락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다. 자연을 표현한 그 어떤 글보다 쉽게 모두의 가슴으로 들어온다. 헤겔이 그의 미학 책에서 예술의 최고봉은 문학이요, 바닥은 건축이라 분류한 것에 가우디는 보기 좋게 건축이 문학 그리고 그 이상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증명한다. 초월적 존재들과 대화할 수 있는 건축이란 언어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가우디의 예술 코드를 이해하게 된다.
가우디 건축이 관광지의 전시물이 아닌 이유를 누군가 당신에게 묻는다면 어떻게 답하겠는가? 난 아주 쉽게 이 의문에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만약 당신이 바르셀로나 가우디 건축물에 간다면 단번에 알 수 있다. 그곳에서 어린아이들이 즐겁고 행복해 한다는거다. 부모가 아이들에게 어떻게든 하나라도 더 보여주면서 무언가 설명해 주려고 노력하는 유럽의 다른 성당과는 달리 가우디 건축물에서는 아이들이 스스로 건축물과 대화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발견한다. 건축양식, 대가의 건축 그리고 건축예술의 의미를 굳이 설명해 주지 않아도 아이들은 가우디 건축물 속에서 그 누구도 아닌 자신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이다. 이는 여느 관광지의 전시와는 비교할 수 없다. 아이들은 이렇게 스스로 자신이 속한 세상 속에서 가우디 건축을 자신의 언어로 재맥락화하고 있는 것이다.
가우디를 좀더 이해하기 위해 다른 화가의 작품 하나를 잠시 소개할까 한다. 벨라스케스(Diego Velazquez)라는 화가의 ‘시녀들Las Meninas’(1656)라는 그림에 얽혀 있는 이야기다. 마드리드로 미술유학을 온 피카소는 학교 공부에 영 취미가 없었다고 한다. 학교를 빼먹기 일쑤고 수업에도 집중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하루는 학교에서 단체로 현장견학을 간 프라도 미술관에서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이란 작품을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다. 이 작품을 만난 후 피카소는 프라도를 짬이 날 때마다 찾아가 ‘시녀들’ 작품 앞에서 시간을 보내게 되는데 이후 9년간 이어졌다고 한다. 전부는 아니겠지만 많은 부분 벨라스케스로부터 자극을 받아 탄생한 것이 피카소의 큐비즘 기법이었다. 시녀들이란 작품의 어떤 부분이 그렇게 피카소를 사로 잡았을까? 혹시 시녀란 작품을 본적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작품 앞에 서 있으면 그림 속 화가, 즉, 벨라스케스는 관객을 보고 무언가 말하려 하는듯 보인다. 만약 마드리드를 방문할 기회가 있다면 벨라스케스의 시녀들 작품 앞에서 그와 시선을 마주하고 대화를 나눠보길 바란다. 피카소 처럼 말이다. 시간을 훌쩍 뛰어 넘어 작가와 대화를 나눌 수 있을 때 작품은 미술관, 박물관의 전시에서 벗어나 바로 지금 일상 속에서 되살아나 지금 현재 맥락으로 재해석될 수 있다. 건축가 가우디는 바로 이점을 정확하게 이해한 예술가였고 철학자였다. 지금 현재 상황에서 재맥락화될 수 있는 건축물을 남겼으니 말이다.
9년이란 결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피카소는 벨라스케스와 만나 대화를 나눈 것이었다. 벨라스케의 남겨진 그림과 말이다. 하지만 그림 속 화가의 시선은 끊임없이 피카소를 놓아주지 않았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결정이 있었던 날이었다. 난 새벽에 일어나 책상에 앉아 우연히 눈에 띤 작가의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잠시 시집을 읽었다. 강의 준비를 하고는 한강의 수상소식을 전하는 딸애의 문자를 확인했다. 그리고 다시 그 시집을 펼쳐 같은 시 몇편을 반복해서 읽었다. 한강의 시, 즉, 텍스트는 같으되 시는 전혀 다른 얘기를 하고 있는듯 했다. 작가가 아닌 읽는 사람의 상황 그리고 그로부터 생긴 다른 마음으로 한강이란 작가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피카소는 그렇게 벨라스케스의 텍스트인 시녀들 그림을 통해 다른 대화를 9년간 나눈 것이었다.
9년이란 긴 시간 동안 작가의 텍스트 그림과 함께 달린 마라톤이었고 매일 다른 마음과 처해있는 현실에 따라 말을 건네는 벨라스케스 텍스트의 의미를 마치 암호를 풀듯 해석해 내야 했다. 즉, 9년 동안 그림 속 숨은 의미를 해킹한 것이었다. 피카소는 해커톤을 진행한 것이었다.
가우디 건축은 텍스트와 같다. 말을 건네고 재미난 문제를 그날 그날의 상황에 맞게 쉼없이 질문을 던진다. 건축물의 아름다움과 디자인 원리, 숨겨진 진리가 그곳에 있어 정답을 맞추듯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어떤 세계에서 살고 있는지 말해준다. 그곳에 가는 것이 아니라 그가 마치 바로 이곳에 와서 겪고 있는 아픔과 고민을 함께 풀어 보자고 제안한다. 가우디 해커톤은 이미 시작되었고 언제까지 달릴지 벌써 궁금해 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