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식 갖춘 초대장은 의미없었다
계엄의 순간 그 장소에 있었던 의원들과 계엄의 순간 다른 곳에 모인 의원들로 나누어 졌다. 이 두 부류의 의원들에게는 전혀 다른 세상이 열릴 것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다음 총선에서 누군가는 다시 의원이 되고 다른 누군가는 떨어질 것이라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들 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인 우리도 전혀 다른 정치의 세상을 겪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미래라는 지엄한 시간이 어떻게 우리의 세계 속으로 들어올지 두려워 해야 하는 이유다.
그리고 그곳에 있었던 다른 존재가 있다. 어린 세대였다. 그들은 응원봉을 들고 축제를 즐기듯 그곳에 있었다. 걱정되어 심각한 표정으로 그곳에 간 기성세대는 “걱정말아요” 라고 외치며 밝은 미래는 반드시 올 것이니 다가올 미래를 축하하자고 외치는 어린 세대에게 제대로 한방 먹었다. 언론, 특히 해외 언론에서 여태껏 없었던 현상이라고 보도한다. 언론에서는 새로운 시위문화가 생겼다고 하지만 나는 새로운 세대의 선언이 있었다고 해석하고 싶다. 이제 세상은 우리의 것이라는 선언 말이다.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드러나겠지만 여태껏 기성세대의 정치와 문화에 적응하면서 때론 저항했었지만 이제는 새로운 세상을 아예 스스로 만들겠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미래를 이어갈 정치인들과 미래를 선언한 어린 세대가 그곳에 “실제로” 있었다.
영화 노팅힐의 첫장면 휴 그란트가 운영하는 노팅힐 여행책 서점에 줄리아 로버츠가 들어와 튀르키예 여행 전문 책을 하나 고르자 휴 그란트는 다른 책을 소개해 주면서 책의 저자가 실제로 튀르키예에 가본것 같다는 말을 한다. 멋진 컬러 사진을 잔뜩 담고 있는 책은 비싸기만 하고 튀르키예를 제대로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지 못하니 그 책 대신 저자가 실제로 최소한 가보기는 하고 썼을 것으로 믿어지는 상대적으로 저렴해 보이는 책을 추천한 것이다. 휴 그란트의 이 배려가 두사람을 연결해 주는 첫 순간이었다. 역사의 진정성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그곳에 있어야 한다. 그곳에 있는 것과 마음이 딴 곳에 있는 것은 당연히 다르지 않겠는가.
역사에서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실제로 그곳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전제한다. 지식과 교훈으로 아는 것이다. 과거 그 시간, 그 장소로 갈 수 없기에 어쩔 수 없다. 하지만 현재 일어나는 사건은 그곳에 갈 수 있다. 하지만 현재의 사건에도 가지 않고 지식과 교훈으로 이해하려면 그건 진정성을 갖기 불가능하고 무엇보다 그곳에 가야만 생기는 가능성을 차단한 것이다. 지금 사태에서 이전 탄핵을 강조하고 그 때 그랬어 라고 말하는 의원들은 지금 순간 그곳에 가지 않고 과거에 머물며 정치라는 행위를 하고 있다고 믿는다. 오직 관념과 해묵은 지식으로 하는 정치다.
정신나간 지도자가 심판받고 늘 대중을 가르치려 들면서 화가 나 있는 정치인들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정도의 쓰나미가 아닐 것이라는 예상을 해 본다. MZ 또는 디지털세대로 이름지어졌던 그들은 이제 본격적으로 역사가 될 시대의 시간 속으로 들어왔다. 초대받아 온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선언하고 들어와 버렸다.
한국발 울리고 있는 새로운 세대 쓰나미 경보가 나에게만 들리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