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교육의 출발과 종착은 관심

소통에서 언어를 거두어 관심의 관계로 되돌리는 책무

by 강하단

소득불균형을 주제를 예술교육을 얘기하고 싶다. 고기를 구우려면 장작이 필요하듯 소득불균형에서 장작과 같은 소재를 찾아야 한다. 다음으로 장작에 불 붙이듯 소득불균형 장작에도 불씨가 필요하다. 고기, 장작, 불씨를 준비했으니 오늘은 예술교육 현장에서 소득불균형 고기를 맛있게 구워보자.


예술교육은 예술을 교육하는 것과 예술적 방법으로 교육하는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이번에는 두번째, 예술하듯 교육하는 방법을 다룬다. 예술은 대상을 감각하여 나의 것, 나의 앎이 생성될 때 자아를 순간에 잠시 머물게 하는 행위로 정의된다. 이제 예열은 충분해 졌다.


“예술교육은 이상 사회를 상상하고 실현을 목적으로 사물을 감각하여 생성되는 순간의 정보가 앎의 지식으로 형성되는 경험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예술교육은 감각이 끊임없이 요동치며 생성하는 순간의 기록이다. 대상에 대한 관심없이 감각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관심에서 출발하여 감각이 바통을 이어 받는다. 감각이 생성한 순간은 인간이면 모두 소통하고 싶어진다. 이때 언어가 필요하고 소통의 결과는 사회의 모습을 변화시킨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주의할 게 하나 있다. 관심, 감각, 언어, 소통 중 딱 한가지 쓰면 쓸 수록 기계처럼 결과물을 찍어내는 것이 있는데 바로 언어(기호)이다. 그래서 언어는 리사이클링까지는 허용되지만, 재사용은 허락되지 않는 것이 좋다. 언어의 재사용은 곧 기능을 작동하는 기계적 속성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예술교육 현장은 감각할 사물을 가진 공간이면 족하다. 교육자와 피교육자는 함께 감각하고 앎을 지식으로 변화시키되, 차이가 있다면 교육자는 교육의 의도를 가지며 피교육자는 교육자의 의도는 애초에 모르고 교육과정을 통해 얻는 가치에 목적을 둔다. 다만 예술교육에서 교육자는 피교육자에게 자신의 의도를 굳이 밝힌다.


소득불균형 대상으로 돌아가보자. 사회 모든 곳에 대상이 있으니 예술교육 현장은 어디든 상관없겠다. 교실, 숲 속, 바닷가, 도심 한복판 어디라도 좋다. 그곳으로 교육의 소재를 가져 가기만 하면 된다. 이제 교육자는 소득불균형이란 대상에서 소재를 끄집어 내어 피교육자가 소재를 감각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부동산, 암호화폐, 주식 등의 소재를 택하는 것이 교육자의 첫번째 역할이다. 소득불균형을 감각할 소재가 생겼다. 다음은 장작의 불붙일 불씨다. 부동산, 암호화폐, 주식투자 등으로 야기된 소득격차는 서민들에게 불씨를 제공하기 충분하다. 이제 예술교육자가 두번째 역할을 할 때가 되었다. “잘못됐다”, “정부는 뭐하냐?”, “자본주의에서 당연한거 아냐?” 등으로 기존의 지식, 법, 관습과 사회통념으로 직진하는 피교육자를 진정시켜 몸이 얘기하는 감각에 집중하길 주문하고 자신도 감각과 행동으로 보여주는 역할이다. 그러고 나면 세번째 역할이 기다리고 있다. 진정시켜 폭발직전인 피교육자가 말하고 소통할 수 있는 언어를 제공해 주어야 한다. 꼭 말과 글이 아니어도 좋다. 오히려 다양하면 효과가 커진다. 음악, 회화, 조각, 건축, 정치 정책, 법 등 다양한 언어가 선택을 기다린다. 기존 언어가 아니어도 좋다. 디지털 시대 게임의 언어라면 오히려 더 좋아 추천하고 싶다. 언어를 제시하면 피교육자는 소통하면서 사회 속으로 연결된다. 이제 교육자의 역할은 끝이 난다. 이후 예술교육의 후반부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연결, 즉, 소통의 결과를 교육자가 감당하기는 힘들고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숙제가 하나 남아 있기는 하다. 소통의 언어가 굳어져 기능화되고 표준화되어 공장의 공정에서 상품 찍어내듯 소득불균형 소재 해결 행동들이 쏟아져 나올 때, 굳어져 버린 소통의 언어를 만들어 제공한 예술교육자로서 해당 언어를 거두어야 한다. 언어를 폐기처분하여 소통을 멈추고 애초 처음 가졌던 관심의 관점으로 되돌려 놓아야 할 의무와 책임이 예술교육자에게 있다. 애당초 그렇게 정의했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이제 끝이 났고 새로운 다른 예술교육현장으로 가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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