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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빈 스미스는 어떤 리더였을까

절대악도, 절대선도 없는 세계에서.

by 인천사람

강철의 연금술사 이후로

이렇게까지 생각해보게 하는 작품이 있었을까.


강철은 사회적인 열풍까지 일으키지는 않았지만,

진격의 거인은 조금 다르다.

특히, 우리 사회에 소위 한 마디 씩 던지는 사람들이

진격의 거인 리뷰와 본인의 해석을 남겼다.

이 여파인지 전혀 안 볼 것 같은 사람들도 보더라.


자연스레 지인들 사이에서 최애캐에 대해 묻게 되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조사병단 단장 엘빈이라 답한다.


누군가는 엘빈이 정말 우둔하고 답답하다 하지만

지휘관으로서 엘빈의 선택은 최선이지 않았을까.

많은 이유가 있지만, 몇 가지만 추려 보면 대강 이렇다.




일단 본인이 앞장서서 죽을 준비가 돼 있다.

큰소리치고 거인 오면 꽁무니 빼지 않는다.


동료의 죽음을 상기할 줄 안다.

엘빈의 화려한 언변으로 많은 대원이 심장을 바치려다

팔다리부터 바치고 머리통이 씹히기도 했다.


그래도 기억할 줄은 안다.

귀멸의 칼날에서 우부야시키 큰 어르신 포지션이랄까.

(물론 큰 어르신만큼 이름을 기억하려나 모르겠다.)


다만 그도 죄책감이라는 일말의 책임은 느낀다.


하나 남은 친구가 편 들어주니 웃을 줄도 안다.

‘냉혈한에 소통 부재 아가리 파이터’라는 평도 있지만

난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본다.


본인의 판단으로 죽은 동료가 정말 많은데,

그러면 이 죽음은 무의미했는가.

자칫 더 큰 희생을 치러야 하는 상황은 아니었나.



‘개인의 집착으로 동료를 사지에 내모는 리더’

엘빈에 대한 평가인데, 그는 실제로 꿈의 노예였다.

그리고 꿈에 가까워졌을 때는 광기를 보이기도 했다.

한 개인으로 보면 엘빈을 마냥 좋게 볼 수 없다.

다만, 지휘관으로서의 엘빈은 최선을 다했다고 본다.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소통을 요하는 상황에 대대적으로 소통했다면

더 많은 대원들을 잃었을 거다.

폐쇄적인 조직 안에 스파이가 있었으니까.


생사가 걸린 작전에 투입된 지휘관이라면

그 미치도록 찝찝한 선택의 순간을 알 거다.

이러나저러나 난관은 예상되고

전력의 손실을 최소화해야 하는 상황.


지휘관의 판단은 5.1 : 4.9를 보아야 한다.

1의 이득을 얻기 위함이 아니라

손실보다 0.1이라도 이득이 크다면

그 선택을 하는 게 맞다.


스스메-!!

스으-스으-메에-!!


새벽 6시 기상나팔보다 잠을 더 잘 깨운다는

바로 그 명대사를 낳은 에피소드.


맨 앞에서 지휘하다 거인에게 팔이 잘리지만,

잘려 나가는 팔에 덜렁덜렁 끌려가는 찰나에도

자신 말고 동료를 탈환하러 앞으로 가라는 앨빈.


이런 리더가 우리 사회에 몇이나 될까.

거인이 무서워 동료보다 뒤로 빠지는 리더가 태반이다.

리더의 직함은 책임값이다.


동료를 위해 앞으로 나아간 이들이 죽어 나갈 때.

타이밍 봐서 결정타 날려주고 동료 탈환에 성공.


숱하게 죽어 나간 동료들을 대신해

엘빈은 배 이상으로 강해져야 했을 거다.


가장 좋아하는 장면.

내뱉은 단어는 다르지만,

장교로 복무할 때 소대원들에게 했던 이야기와

맥락이 정말 똑같아서 놀랐다.


영화 300의 ‘저녁은 지옥에서’와 같은 임팩트였다.



육체적인 한계를 뛰어넘은 적이 있는가.

승산에 대한 판단은 육체적 한계가 다가올 때

더 빠르게 되고, 주로 포기하는 쪽으로 기울고 만다.


후보생 시절. 38도까지 치솟았던 여름.

땀을 미친 듯이 흘리면 염분 없이 물맛만 난다는 걸

평생 살면서 처음 깨달았다.


임관을 앞둔 훈련에서 옆 동료들이 쓰러져 나갔다.

우리는 그들을 짊어지고 죽을 때까지 발버둥 쳤다.

그리고 낙오 없이 모든 인원이

스스로의 한계, 나약해진 본인을 이겼다.




학군사관후보생 때부터 초급 장교를 거쳐

소위 ‘간부’라 부르는 직급으로 가기까지

인생에서 정말 큰 경험을 했다.


어렵다면 어려운 과정을 거쳤기에

조사병단, 특히 단장인 엘빈의 입장에서

‘나라면 저 상황에 어땠을까’를 생각하며 봤다.


인간의 밑바닥을 드러내는 육체적 고통과 피로,

멘탈을 가뿐히 부숴버리는 온갖 상황,

그 과정에 생기는 갈등과 그걸 풀어내고 갖는 신뢰.

우리는 이 시간을 함께 보냈다.


심장을 바치는 이유는 모두 다를 수 있지만,

목적은 같았다. 벽 밖의 자유.

그렇게 각자의 팀을 찾아 전국으로 흩어졌다.

긴 시간 이후 서로의 팀을 이끌고 벽 밖으로 나왔다.


엘빈에게도 이 기간은 있었고,

에렌의 엄마 카를라가 말했듯

그 또한 처음부터 ‘특별한’ 사람은 아니었다.

시대가 그를 특별하게 만든 게 아닐까.


벽 밖에는 거인이 있다.

두려워 나가지 않는다면

인류는 평생 자유를 얻지 못한다.

사육되는 동물이 아니라 사냥꾼으로 살다 죽는다.


완전한 자유와 삶의 의미.

진격의 거인 핵심 키워드 두 가지를 위해

꿈을 좇던 어린 엘빈은 어른으로서 죽는다.


팔이 잘근잘근 씹히는 와중에

‘난 알아서 갈 테니 빨리 앞으로 가라’라는 뜻으로

스스메를 외쳤던 이 시대 알파 메일.


그걸로 됐다.

꿈을 포기하고 죽어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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