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재구의 시 『사평역에서』
삶의 어느 순간에 바라보는 것들,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나는 요즘에도 12월 초순이 되면 신문사 신춘문예 공고를 지나치지 않고 들여다본다. 또한 새해 첫 신문에서 신춘문예 당선발표와 그 작품들을 우선해서 찾아보기도 하는데, 이미 오래전부터의 습관적 관심사이다. 혹시 남아있는 미련이라도 달래려거나, 아니면 아직도 끝나지 않은 일방적인 연모의 정을 드러내려는 것인가? 싶기도 하다. 아무튼 신인들을 뽑는 콘테스트에, 또는 이들의 경향을 파악해 보려는 의도가 있는 것도 아니라면, 진즉에 지난 일이 되어버린 입문과정에 대해, 그리고 이미 등단작가가 된 마당에 격에 맞는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래 전 신문사를 통해 등용되는 것에 큰 의미를 두었던 것은, 또한 제대로 준비되지 못한 실력(?)임에도 가슴 속 깊이 담아두었던 씁쓸한 기억은, 굳이 드러낼 필요는 없지만, 지워지질 않는다. 그러하니 대학졸업 무렵 존경하는 은사님께서 유명 문학지에 추천을 해주시겠다고 하는 고마운 배려조차 완곡하게 핑계를 대며 거절했던 것을 오래도록 후회하고 죄스러워했었다. 더불어 당시의 그 잡지는 고사하고 권위(?)조차 없는 신생 문학지에 겨우 등단하는 것에 만족하는 처지가 되었을 뿐이다.
당연하지만 등단이라는 방식과 절차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제대로 글을 사랑하고 문학의 소중한 가치를 탐구하면서 오래도록 그 성과를 부지런히 창작하여 작가로서 의무에 충실해야 하는 것이 더 필요하고 본질인 것인데, 이런 등단과정에 매이는 것은 그 본연(本然)에 대한 왜곡이기도 할 것이다.(한편 화려하게(?) 등단했지만 제 글을 써 내지 못하고 대중과 문단으로부터 멀어진 작가들이 숱한 것은 매우 아쉬운 부분이다.)
그럼에도 젊은 시절에 이런 치기(稚氣)어린 도전이나 기대는 불가피하거나 의욕의 부산물이기도 하며, 인간에게 무엇이든 겨루기는 피할 수 없는 행위인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신문이 아니더라도 문학지등 여러 다른 매체를 통해서도 발표자격이나 지면을 얻을 수 있는 방법들은 많은 것이지만, 신문이라는 매체의 조건은 희소하고 대중에 주목받으며 마치 광영을 얻을 만하다는 평판까지 주어진다는 생각이라면 이왕지사 도전할만한 것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굳이 필요한 것이 아님에도 새삼 생각이 났다. 개인의 부끄러운 기억까지 끄집어 낸 것이 마땅치는 않지만, 지금 쓰려는 글이 마침 신춘문예 당선 시를 읽으려는 것이기에 이리 서설(序說)을 늘어놓았다.
나는 곽재구 시인의 신춘문예 당선작 「사평역에서」가 참 좋았다. 20대 중반을 향해가던 그때 내 정서에 와 닿았고, 매우 서정적인데도 감정을 적절하게 절제하면서 개인의 내면에 치우치지 않고 세상을 향해 열려있는 그의 시선(視線)이 따뜻하고 너그럽다는 생각을 하였다. 내가 군대에 입대하여 졸병(卒兵)으로 근무하던 때였던 1981년 중앙일보에 당선하였는데, 당시 27세의 곽재구는 이렇게, 어설프고 그래서 서러움을 안고 살아가는 세상을 향해 누구라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려는 심정으로 시를 쓰고 있는 것에 나는 크게 이끌렸다. 나서지 않으면서, 그러나 물러서지도 않으면서 함께 느끼고 공감하고, 때론 편이 되어 주면서, 또 지켜보는 편이라 할 자기 스스로조차 측은히 여기면서도 자기의 마음을 열어 보이는 시인, 곽재구에 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사평역에서
-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 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 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곽재구, 「사평역에서」 전문, 중앙일보신문문예(1981년) 당선작
나는 우선 <사평역에서>라는, 이런 제목에서부터 끌렸다.
사평역이 어딘지는 모르지만, 어느 시골의 작은 간이역쯤 될 것이고, 왠지 처연하고 서글프고, 그러나 살아있고 살아내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어딘가로, 또는 집으로 가기위해 기차를 기다리고 있는 작은 역의 대합실이 연상되었다. 그 역에서 본인 스스로 감정이입을 하건, 역 안에 있는 사람들을 관찰하건, 그래도 인정 있게 바라보는 시인의 모습이 그려지는 그런 제목의 작품이었다.
처음엔 <사평역>이 어느 곳에 있는 역인지 찾아보기도 하였지만 실제 존재하는 역 이름이 아닌 시인이 지어낸 가상의 역이었다.
20대 초반을 지나고 있던 그때, 나는 곽 시인의 당선을 알리는 신문에서 이 시를 읽고 시 자체에 대한 감상에 매달리면서도 이 시인을 부러워했었음을 고백한다. 당선된 것에 대해, 이런 감성을 충분히 감당하고 이렇게 시를 완성한 곽재구 시인이 솔직히 부러웠다. 젯밥에 관심이 가듯이, 시와 시인의 문학보다 이 시의 당선과 관련한 외연(外緣)에 더 이끌린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런 감성이 그때는 내게 절실히 다가왔었다는 것도 실토(實吐)해야 한다. 젊은 감성 탓이기도 할 테지만, 머무르지 못하고 어디로 떠나가야 하거나, 그래서 자주 외롭고 흔들리는 대상들에 대해 자연스레 측은히 여기면서 연민을 느끼거나 하는 이런 심정은, 개인의 특성이기도 하겠지만 나의 젊은 날에는 이런 감성 쪽으로 기울어 있었던 것 같다. 나는 그때, 힘에 넘치는 의욕과 활기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 맞을 젊음의 시기를 그렇게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곽재구 시인이 그려낸, 막차를 기다리는 작은 간이역은 스산하고, 아니, 춥고 싸늘하며 적막하기까지 한 초라한 장소를 떠올리게 한다. 예정시간을 넘기고도 오지 않는 막차, 피곤에 지쳐 졸고 있는 사람들과 감기로 기침하는(쿨럭이는) 고단하기만 한 사람들로 채워진 풍경이 그려진다. 그리고 대합실 밖에는 함박눈이 내리고 있는데, 바람이 부니 흰색의 수수꽃처럼 눈(雪)은 눈(目)을 시리게 하듯 창에 쌓여 부옇게 바깥 시야를 가려가고 있다. 그리고 그 창으로는 대합실 안의 톱밥 난로가 반사되어 비치니 따뜻한 이미지를 느끼게 한다. 이것은 시인이 서글프고 절망감이 드는 상황에서도 오히려 과거 어느 때 즐겁고 행복했었을 순간을 떠올리며 희망의 불씨를 피우려는 심정으로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듯이 이들과의 동류(同流)의 마음으로 함께 하고자 한다는 내적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시인은 결코 놓아 버릴 수 없는 희미한 끈이라도 포기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이것이 시의 마법이라 할 수 있다. 결코 대놓고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한 겨울 자정을 앞둔 늦은 밤의 쓸쓸한 대합실 풍경이 어느 순간 따사롭게 바뀔 수 있게 하는 희망의 기운을 담아내는 것이다. 시인의 은근하지만 대상을 파고드는 마음으로 던지는 “한 줌의 톱밥”은 잊었던, 아니면 어딘가 숨어 있었을 밝은 기운이나, 겉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화기(和氣)를 자극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피곤에 절어 고단하고 무기력한 마당에 무엇 하나 삶의 의욕이란 찾기 힘들고, 그저 어서 집으로 돌아가 춥고 허기진 채, 지쳐버린 몸을 쉬고 싶은 마음뿐인 사람들, 고작 몇 명 정도 있을 뿐인 썰렁했을 대합실 안을 이처럼 차갑지 않게 그려내고자 하니, 젊은 시인의 따스한 감성이 나름 넉넉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 준다.
이런 식으로 시인은 대합실 안에 함께하는 그들과 거리를 두지 않으면서 그들의 아픔이나 생활의 곤궁함이나 사연들을 내면으로 느끼면서 공감하고자 한다. 시인은 그들의 내면을 채우고 있는 할 말 많은 사연들을 세세히 털어놓아 공유하지 않아도, 누구든 아무 말 하지 않아도, 그저 일상의 삶이 그런 것이므로 침묵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지금은 오히려 세파에 시달려 시퍼런 색이 되어버린 얼어터진 손이라도 녹이면서 이 시간을 견뎌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전부터 “오래 앓은 기침”을 달고 지내면서, “쓴 약 같은 입술 담배”를 위안하듯 피우며 스스로 거두고 넘어서면서 살아가는 중인 것이다. 따라서 시인은 이들과 함께 그저 대합실 밖에 “싸륵싸륵” 눈꽃이 쌓이는 것을 바라 볼 뿐이다.
곽재구 시인은 내면에서 일어나는 동요(動搖)와 혹시라도 느꼈을 동화(同化)로 인해 울화(鬱火)가 떠올랐을 지라도, 충분히 스스로를 절제하거나 억제하면서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라며 대합실의 분위기에 동화한 채 자기의 시선으로 간이역의 대합실에 깔려있는 지치고 우울한 정서의 이면을 읽어내려 하는 중이다. 그러면서 시인은 대합실의 본질인 ‘그립고 보고 싶은 사람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갈 수 있는 희망과 기다림의 장소’로의 변화와 함께 그들이 바라는 목적지로 향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시인의 눈은 이때에도 자기의 서정적이면서 시적인 염원을 잊지 않는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라고 하면서, 시간이 흐르며 눈은 내려 쌓여 세상을 온통 하얗게 뒤덮을 것이며 더불어 세상의 근심이나 미래에의 걱정조차 눈 속으로 사라질 것이라는 은유적인 기원과 함께, 곧 달려올 기차의 차창(車窓)을 단풍잎(야간열차이므로 밖에서 보면 기차 안 불빛으로 인해 차창이 마치 단풍잎 같다는 비유*필자 주)에 비유하며, 단풍잎을 통해 가을의 화려했었던 시절의 모습을 떠올림으로써 긍정적이면서 부드러운 정서를 담아내려 한다. 시인은 이런 세련된 시적 서술을 통해 은근하게, 또 서두르지 않으면서 모두에게 “그리웠던 순간들”을 상기시키려 하면서, 스스로 이들을 향해 깊은 연민의 정을 담아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주며 공감과 마음의 교류 의지를 전하려 하고 있다.
역(驛)이란ᆢ 도착하려는 곳이면서 도착지로 떠나려는 곳이다. 그리고 도착지는 새로운 곳(미지의 장소를 포함)일 수도, 돌아가려는 곳이기도 할 것이다. 어디로든 떠나려는 것에는 희망이나 안정이나, 혹은 절망이나 불안일 수도 있는 것들을 품고 있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여전히 변하거나 달라질 수 있다는 기대를 향해 가려는 것이기도 하다.
한 겨울의 한적해 보이는 작은 간이역, “사평역”은 쓸쓸하고 외롭고 서글픈 기색까지 느껴지는 동떨어지고 낯선 역이지만, 시인은 결코 삭막하게 놔두지는 않았다. 다시 일어서거나 돌아가거나, 무언가를 가슴에 채워 담고 떠나는 곳으로 암시하려는, 그런 마음을 내보이려는 표시를 감추지 않고 있다. 이런 자세 덕에 오히려 쓸쓸하고 서럽지 않게, 또는 따뜻하고 기운이 나게 한다. 시인의 깊은 호흡이 은은하면서도 멀리 퍼지며 생명의 기운을 자극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사람들에게는 저 마다의 “사평역”이 하나쯤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전 과거에서부터 지금을 지나 내일로 가는 길목에서의 정거장이라는 의미이다. 인간의 삶은 때로는 쓸쓸하고 외롭고, 또 막막하고 무기력하기도 한다. 간혹 그리움의 대상들이, 그런 순간들이 떠올려지지만, 그 이야기들을 누구에게도 이야기하기 어려울 때가 있기도 하다. 그저 지금이 힘들고, 지금에 몰입할 것들이 있을 뿐인 순간에, 다만 당장에 다가가려는 안식처이거나 고향이거나, 아니면 어떤 목적을 위한 행선지로서 우선하는 것에 매달릴 뿐인 것이다. 아직은 꺼내고 드러낼 상황이 아니므로 잠시 묻어둘지언정, 다만 참고 기다리면서 지금을 살아내야 할 때도 있는 것이다.
시인 곽재구가 인생행로에서 잠시 머무른 간이역의 대합실에서 겪었던 과거의 대합실을 이제는 “밤새 송이눈이 내리는 대합실”의 밖에서, “흰보라 수수꽃이 눈 시린 유리창”을 통해 톱밥난로가 타오르고 있는 대합실 안의 불빛을 바라본다면, 한 겨울의 대합실 안은 따뜻하고 아늑한 정경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구도로 보면, 막차를 기다리는 현실의 대합실 안보다 대합실 밖에서 들여다보이는 대합실 안의 실루엣에서 더욱 정겨움이 느껴진다.
비록,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실망하고 낙심하여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무겁기만 하지만, 여전히 오늘의 일은 불만족하고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이 크기만 하고, 원하는 것들이 완결되지 못하고 남겨짐으로 해서 곤궁함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그래도 돌아갈 곳을 향해 잠시 기다리는 심정은 절망적이지 않다. 과거에서 온 시간이 지금을 거쳐 얼마 후에는 맛볼 수 있는 휴식과 위로를 생각하며, “눈꽃의 화음에 소리 죽여 귀를 적시며”, 잠시 지금의 나를 내려놓으면서 현실의 이미지가 투사(投射)된 대합실을 안과 밖으로 구분하여 그려보며, 삶의 내적 토양을 일구고자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결국 삶의 현실은 지치고 낙심하여 쇠락하고 초라하게 드러날 지라도 인간의 내면에서 자라나고 있는 새로운 기운을 기대하면서, 혹시라도 “지난날의 그리웠던 순간들”을 오버랩하면서 바라는 삶의 모습을 한 번 더 꿈꾸어 볼 수 있기를 모두에게 또는 자신에게 위로와 염원을 담아보려는 것으로 생각을 뒤바꾸어 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가 불빛 속에 던진 “한 줌의 눈물”은 연민과 슬픔의 눈물만은 아닌 것이다. 생애를 통하여 우리가 떠나야 할 삶의 여정을 향한 카타르시스catharsis의 눈물이며, 타오르는 불빛에 붓는 기름과도 같은 생기의 원천이기도 한 것이다.
젊은 시인은 한 겨울 자신의 가슴에 담아 두게 된 인생의 교차역인, 냉기로 가득한 간이역 대합실을 따뜻한 온기로 채워 놓고자 하였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시절의 고비마다 겪었을 수많은 희비(喜悲) 속의 삶은 이렇게 구차하게 엇갈리기도 하고, 쓸쓸하고 힘겹고, 때론 절망적이기도 하였지만, 또한 우리는 늘 떠나고 다시 만나고를 반복하면서 그 어느 것도 머무르게 하지는 않으면서 살아간다. 그러던 중에 기다리던 기차는 어느 순간에 나타나고, 그 기차는 곧 이곳으로부터 나를 벗어나게 해줄 것이다. 그리고 기차는 지난날을 그리워할 순간으로 돌려놓는 시간이동처럼 나를 ‘언젠가’로 데려가 줄 것이다.(강화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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