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안쪽_29.
얼마 전 가까운 지인이 매체에 발표한 칼럼을 읽었다. 30여년을 출판업에 몸담은 출판인인 그가 볼 일이 있어 광화문부근에 나갔다가 습관적으로 들른 근처 대형 서점의 베스트셀러코너를 지나다 무심코 본 그 리스트에 놀랐다고 하였다. "쇼펜하우어"를 주제로 한 책이 베스트셀러 1위에 올라 있었는데, 철학 서적이 1위가 된 것도 드문 일이거니와, 선정된 15권의 베스트셀러들 중에 "쇼펜하우어"를 다룬 책이 3권씩이나 포함되어 있는 것에 특이하고 뜻밖이어서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고 하였다. 그는 출판전문가로서 베스트셀러에 올랐다고 하여 책의 질(質)이나 가치의 우수성을 대신하는 것은 아니며 상업적 목적이 감안된 지표이기도 하니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을 테지만 출판인으로서 그리고 대학에서의 전공이 철학인 탓에 쉽사리 무심해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나는 이 칼럼을 읽은 후, 그 책들의 내용과 정보를 대략이라도 알아 보기위해 인터넷 서점에 들어가 검색을 해보았다.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른 책은『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라는 제명의 책인데, ‘마음의 위기를 다스리는 철학 수업’이라는 부제가 달려있었다.
그간에 ‘마흔’이라는 나이를 주제로 한 수많은 책들이 있었고, 이 책과 유사한 제명의 책들은 이미 여럿 출판되어 독자들에게 노출된 바 있다. 나이를 필두로 한 이런 류(類)의 책들이 꽤 있었지만, 유독 “마흔”에 대해서는 보다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인 경향이 있었는데, 이에 하나 더 보태진 느낌이었다.
나는 쇼펜하우어를 잘 알지도 못하고, 책의 내용조차 아직 모르기에 이 책에 대해서 할 수 있는 말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왜 지금 쇼펜하우어인가에 궁금증이 일었다. 나의 지인도 그런 의문과 관심을 가진 터였는데, 인터넷의 책 소개 내용으로 어렴풋이나마 책의 의도는 짐작할 수 있었으며 곧 바로 내 마음대로 드는 생각들이 떠올랐다.
우리는 공자가 “사십이불혹(四十而不惑)”이라 한데서, 사람의 나이 “마흔”에 대해서는 선입견이라 할 명제와도 같은 의미를 떠올린다. 이것은 매우 강력한 기준이 되어 있는 바, 나이 마흔에 대한 인식과 해법의 근본이 되어있다고 할 수 있다. 공자께서는 당신이 사십이 되니 미혹(迷惑)하지 않게 되었다고 하였기에, 우리 역시 그 나이에 이르면 그래야 하는 당연한 귀결이나 다다름의 정도로 느껴야 하는 듯이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우리의 마흔은 공자와 달리 미혹하기에, 흔들리기에 충분할 만치 스스로 안고 있는 불안이나 수많은 도전에 쌓여있다고 할 수 있다. 마흔이 되고 보니 그간에 쉼 없이 달리며 추구한 결과의 초라함에, 또한 내가 이루려고 애쓰고 매달린 것이 이런 것이었나 하는 뒤 늦은 허탈감이나 허무함에 젖게 되고, 그러나 이미 자신은 집안의, 작은 집단의 책임을 떠안은 위치에서 홀가분하지도 못한 처지에 있다. 그럼에도 그대로 자신을 그 자리에 머물게 하거나, 한껏 사사로운 욕망들을 덜어 낸다고 해도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는 수많은 종류의 욕구들을 떼어내기에는 그것들이 진드기와도 같이 달라붙는 느낌이 더할 뿐이다.
이런 생각에 휩싸이며, 이것은 나만의 감정이요 내면의 갈등만이 아닌 듯이 여겨지는 것은 이 같은 “마흔에 운운(云云)”하는 책들이 늘어가고 급기야 “허무주의자”로 알려지고 오늘날 우리와는 그다지 거리감이 가깝지 않은 듯한 철학자 쇼펜하우어까지 거론된다는 것은 마흔이 불혹의 나이이거나 성숙하고 원만한 나이가 아닌 것인가 하는 생각을 굳히게 한다.
쇼펜하우어와는 다른, 보통의 삶을 살아가는 나로서는 “내가 바라는 삶을 살고 있는가?”하는 의문 아닌 질문을 던질 때, 한편으론 “남들은 어떻게 살고 있지?”하며 오로지 “나만의 삶”이 아닌 남들과 비교하고자 한다. 그러면서 나만의 행복, 나만의 인생에 대한 확신이나 설정은 없이 객관적일 수 없는 기준을 들이대며 자신과 자신의 삶을 타인들의 그것들에 비교하며 흔들리거나 불행하게 할 원인을 스스로 제공하기에 이른다. 이러하니 쇼펜하우어가 말한 “행복과 불행은 객관적인 대상이 아니라 인간의 변덕스런 감정에 달려있다”거나, “가지면 더 갖고 싶은 것이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에 자유롭지 못하게 될 뿐더러, 어느덧 마흔에 이르면 지난 시절보다는 더 많이 이루어낸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큰 또는 다른 무언가를 욕심내며 탐욕 하는 마음에 휘둘리는 유혹에 빠지게 되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그래서 여전히 겉으로 드러나는 물적 욕구에 매달릴 뿐 “진정한 자신”에의 성찰이나 “스스로가 살아야 할 삶”에 대해서는 외면하거나 생각조차 할 여유와 기회를 갖지 못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 것 같다. 지난날 마흔 무렵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나마 자신이 추구한 가치와 결과를 보다 더 직접적이고 깊이 있게 들어가 보려하기 보다는 외연을 넓히고 비교대상으로서의 삶의 모습에 치우치며, 그나마 얻었던 것조차 소홀이 하는 우(愚)를 범했던 것은 아니었는가?
“남을 따라서 ‘같음’을 추구하는 것은 낮은 단계의 욕망이다. ‘다름’을 추구하는 것은 높은 단계의 욕망이다. 나를 행복으로 이끄는 방법은 나의 욕망이 이끄는 대로 가는 것이다. 개성 있는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자신의 욕망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태도이다.”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에 나오는 글의 일부를 발췌하고 보니 쇼펜하우어의 사상을 빌린 작가의 의도를 얼핏이나마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공자의 “사십이불혹(四十而不惑)”이 설파(說破)하는 ‘흔들림’의 의미가 2500년을 넘어 오늘날에 대중들이 새겨야할 본질을 쇼펜하우어와 만나 보완되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도 들었다. 지나친 비약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는 없지만 일단 마음으로부터 한편으론 다행스런 위로가 된다. 여전히 나의 옹색한 내면으로는 갈 길이 멀지만, 한해를 보내고 맞는 순간에 이런 식으로라도 나를 달래고 다스리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에 의미를 두려한다. (2024.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