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규현 개인전, “지리산 일기”
경인미술관 2관, 2025 6/25(수)~7/1(화)
경인미술관 2관에서 2025년 6월25일(수)부터 7월1일(화)까지 “지리산일기”라는 주제로 연규현 작가의 개인전이 열렸다. 작가는 지리산에 인접한 경남 함양에 살고 있으면서 주로 ‘지리산’을 그리는 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는데, ‘지리산’이라는 특별한 영감을 주는 산을 전통수묵화풍으로 그리면서, “지리산 일기”라는 즉, 일상을 보내면서 겪어내는 삶의 기록을 연상시키는 ‘일기’라는 이름으로 지리산의 다양한 경치를 시각화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무튼 장마에 접어들었으나, 비는 오락가락하고 날씨는 높은 습도에 유난히 후텁지근하기 짝이 없는 여름에 그의 그림들을 보면서 오히려 차분하고 청량한 기운을 전해 받으니 피서를 대신할 만하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연규현 작가의 작품들은 수묵화이다. 전통적 한국화법으로 시야에 들어온 경치를 담아내고 있는데, 전통적 산수화풍임에도 현대적인 구도와 시점으로 그려내니 그림의 내용이 그대로 전해지면서도 수묵으로 해석한 지리산의 풍광을 즐길 수 있게 된다. 그러나 한편으론 경치를 해석하고 시각화한 의도가 혹시 눈앞의 드러난 것에 있지 않고 마치 행간을 읽어야 하는 책읽기처럼 여백과 공간의 틈에 자리한 심중(心中)을 헤아려야 하는 것 같은 분위기에 젖게 하고 있다.
연 작가는 전시작품들을 ‘수묵풍경화’라고 지정하였는데, 독자들이 그의 작품들을 보는 순간 누구라도 ‘수묵화’, 또는 ‘수묵산수화’라 생각할 만하고, 수묵화란 물과 먹의 농도를 통해 경치를 그려내는 것이니 굳이 경치를 담은 ‘풍경화’라 하지 않아도 될 터인데, 작가는 “수묵풍경화”라 하였기에 어떤 의도라도 있는가라는 생각을 해보게 한다. 아마 ‘지리산일기’라고 전시제목을 내건 뜻처럼, 시야에 드러난 외관에 작가의 심상을 얹히거나 겹치게 하려는 의중을 담기 보다는 지리산에서의 일상을, 그리고 지리산에 반응한 정취를 숨김없이 담아내면서, 눈앞에 펼쳐진 지리산에서의 소중한 일상을 자기의 정서적 반응으로 기록하고자 한 의도가 혹시라도 수묵화나 진경산수화를 연상하게 됨으로써 반응하게 될 무게감이나 방향성에 대한 사전적(事前的)인 조율일 것이라는 생각도 해본다.
이렇게 필자는 작품을 세심히 보기 전에 조심스런 인상체크부터 하게 된 것은 작가의 속내가 담백해 보이고, 스스로 자신을 내려놓는 법을 지향하면서 꽤나 섬세하게 자신을 이끌어 가고 있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부분들을 읽음으로써 작가의 뜻에 앞서 가려는 섣부름을 유발할 수도 있을 테지만, 그의 작품들이 대체로 기교를 피하고 자기의, 보다 잘 해보려는 욕구를 억누르며 스스로 나서는 것을 배제하려 한다는 의도가 읽혀지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연 작가의 작품들을 보고자 한 것이다.
연 작가는 지리산의 어딘가에 거주하며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삶과 자기 생애의 과업들을 연관하면서 살아가는 중일 텐데, 산에 주로 머무른다는 것은 일상적인 평범함을 넘어서는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의 삶이 어떠하다고 단정하기는 어렵겠지만, 우선 관조라는 삶의 자세는 연상할 수 있다. 지리산의 자태를 멀리서 바라다보거나, 산의 안쪽에서 가까이 관찰하거나, 지리산을 느끼며 알게 되는 것은 매우 다양하고 쉽사리 파악하기란 어려울 테지만, 그럼에도 작가는 일상적으로 ‘지리산’을 가까이에 두고 사는 사람의 특권을 충분히 누리려는 듯이 지리산 자체에 대한 비중이나 무게감을 인정하면서도 당연하고도 태연하게 지리산을 인식하려 한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또한 연 작가는 지나치게 서정적이지는 않으려고 한다. 즉 자신이 드러나거나 자신을 내포시키지 않으려 한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살펴보고 담아내고자 한다. 따라서 자기의 정서와 대상과의 거리를 유지하려고 애를 쓰는 듯하다. 이는 일반적인 작가들의 시도이거나 태도가 아닐 수 있는데, 그저 그대로의 대상을 인지하고, 대상의 실체를 지키고 살려내고자 한다. 아마 모두의 것, 절대적인 것이어서 그런 것인가? 그의 태도에는 대상에 대한 “외경심(畏敬心)”이 담겨있다. 이 또한 그대로 드러내려 하지 않고 천연덕스럽게 표현하고자 하지만 분명 이런 정신, 마음이 그림에는 존재한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는 보다 큰 무엇을 위해 남겨두고자 한다는 느낌이 드는데, 작가 개인의 감정이나 정서가 잘 드러나지 않으니, 감정적인 유인이 약해 보여도, 오래 보고 반복한다면, 작가가 자기의 정서는 내려놓고 대상으로부터 보다 큰 것을 받아들이고 느끼면서 의지하려 한다는 것을, 다소 과장된 생각일 지라도, 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자기의 내면이나 기교를 내세우려는 태도를 자제하려 한다는 인상 탓인지, 그의 작품들은 때가 안 묻고 속세와는 적당히 이격한 상태를 드러내려는 의도가 엿보이고 있다. 또한 거칠고 순수하게 붓을 다루면서 대상의 형태와 이미지를 굵고 성기게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 디테일detail에 매이지 않는 통 큰 내면의 태도로 비쳐질 수 있기도 하면서, 지리산이 가진 웅장하면서 오묘한 영적 기운에 대해서는 아직은 감당해 내지는 않으려 한다는 인상이 전해지기도 한다.
그는 한지에 수묵담채로 작품을 그렸다. 지리산의 산세, 계곡을 흐르는 물,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는 야생의 잡목들, 바위의 거친 단면, 꺾어진 나무줄기 등의 시각적 이미지는 다소 거칠고 또 힘이 배어있는 듯이 그리고 있다. 대체로 흐릿한 담묵으로 배경을 그리거나 표현의 톤을 조절하고 있으나, 그의 내면에서의 에너지는 힘이 있고, 끓고 있다는 느낌이 전해진다. 다만 자기와 산과의 관계를 생각하며 절제하고 가다듬고 있는 중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따라서 굳이 채색을 하지 않아도 무언의 메시지가 담겨 있는 듯, 담채에 가까운 수묵화이지만 간단치 않은 힘과 에너지를 포함하고 있으니, 보는 이들도 그에 따른 반작용이 작동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간혹 어느 작품들에는 붉은 기운이 감도는 채묵(彩墨)을 칠하기도 했다. 그 의도를 자세히 알기는 어렵지만 분명 작가의 심중을 은근히 드러내는 표식이자 자기의 소박한 마음의 흔적일 수 있다. 이는 철저한 수묵의 담채화이면서 일부의 작품에서 보여 지는 돌출적 표현처럼 부각되고 있는데, 아무래도 그림의 대상이 된 눈앞의 풍경 속에서 강한 정서적 자극의 신호가 그곳으로부터 작가에게 전해 졌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저 ‘산’이 아닌 ‘지리산’이고, 늘 보며 한시도 떠나지 않은 편안한 품 같은 그곳일지라도 때론 이렇게 뜬금없이 강한 자극의 힘이 느껴지기도 하는 모양이다. 그럼에도 작가는 흔들림이 없이 자기의 풍으로 대상을 그려낸다. 그의 화폭에 들어 온 지리산의 전체이면서 일부 인 풍경들을 자기의 감각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해석하고 이해한 지리산의 정서를 가능하면 자기 식으로 그리고자 노력하면서도 티를 내지 않으려고 하면서 차분히 그려낸다.
전시 작품 중, 원거리에서 화각(畵角)을 잡은, 즉 나는 새의 시선으로 부감(俯瞰)에서 잡아 그린 작품은 지리산 어느 한 편이며, 작가가 자주 오르내리는 어느 능선(稜線)에서 바라다 본 지리산의 일부 모습일 것이다. 그의 마음에 담을 만큼 넓고 크게 “산”을 바라보고자 한, 그러나 작가는 과장하지 않고, 정직하고 순수하게 지리산을 대하려고 한다. 그리고 평상시처럼 평온하고 안정된 상태에서 그린 실경이면서 그의 마음 속 경치이기도 한 것이다. 이렇게 대상에 대한 그의 애정은, 허투루 하지 않으려는 태도와 마음 자세에 의하여 시각적으로 드러내고자 하였으니 작품들 대다수가 담백하고 수사가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경건하게 여겨지는 분위기가 고스란히 담겨지게 되는 것이다.
작품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눈이 내려 쌓이는 날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는 삿갓을 쓴 노승(?)의 뒷모습, 나무 짐을 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촌부, 등산복 차림의 긴 머리를 질끈 동여맨 여성과 나이가 들었을 남성의 뒷모습을 화폭 속에 슬쩍 담아 그렸다.
이들의 존재가 그림 내에서 크게 부각되어 드러나지는 않으나 생뚱맞은 듯하면서도 매우 자연스럽게 전체의 풍경과 잘 어우러지고 있다. 전통 산수화속 인물들이 한편으론 비현실의 존재 또는 이상적 상징으로 그림에 담긴 것과는 다르게, 인간적이면서 친근하게 그려지고 있고, 그러면서도 작가의 의식 속에 그려지는 인간의 삶의 모습이 고고하면서도 유유자적하게 연상되므로 아마 지리산이 품을 수 있는 넓이와 깊이 탓이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은 괜히 여유롭고 한가로워지는 기분을 느끼게 된다. 전통 수묵화에서의 사람들은 자연화(自然化), 또는 자연과 일체가 되려는 기대와 바람을 은연중에 표현하고자 하였지만, 연 작가의 작품 속에서는 과거 진경산수화에서와 같은 ‘사람’의 존재성을 담아내려하기 보다는 이렇게 소박하지만 사람을 받아들이고 또 친화적인 자연에의 교감을 기대하고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연규현 작가는 지리산을 수묵화로 그렸지만, 서양화의 재료와 기법으로 그렸어도 지리산의 고유한 멋이나 운치는 충분히 살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러가 아닌 먹을 통해 흑백의 수묵화로 그린 지리산의 고유한 자태와 정서는 특히 제격인 양, 매우 어우러져 고고한 느낌을 전해 준다. 또한 먹이라는 한 가지의 색은 물의 양을 조절하여 매우 다양한 채도의 효과를 낼 수 있다. 따라서 물과 먹의 다양한 변용으로 먹을 중복하여 검은 색, 마른 색, 축축한 색, 옅은 색 등으로 표현해 내면서 연 작가는 이런 수묵화의 진수를 이번 전시작품들을 통해 드러내 보이고 있다. 따라서 고고하고 웅장한 영산(靈山)인 지리산을 친근하고 정감 넘치는 멋스런 산임을 먹의 농도를 통하여 다양하게 그려내고 있는데, 이런 효과를 통해 멀리 보이거나 거대한 느낌의 존재감에 대한 심리적 거리감이 아닌, 늘 가까이 함께 하면서 주변에 머무르는 이웃과 같은 존재에의 친근감이 감지되니 사람들의 마음에 평온과 넉넉함을 주기도 할 것이다. 아마 연 작가는 이런 의도를 담고자 했거나, 그것이 아니라도 그런 심정을 지리산에 머물면서 마음속에 늘 지니고 있었기에 매우 자연스럽게 화폭에 드러난 것일 수 도 있을 것이다.
연규현 작가는 만난 적도, 일면식도 없는 작가이니 그를 알 수 있는 단서라고는 짧은 시간 동안 바라다 본 작품들이 전부일 뿐이다. 따라서 그가 오랜 연륜으로 깊은 성찰을 지속하는 속 깊은 예술가 일지, 아니면 남다른 뜻으로 삶에의 길을 스스로 개척해 나가는 구도적인 마인드를 지닌 고유하고 독특한 삶을 실천해 나가는 행동주의자인지 알 수는 없다. 다만 자기의 삶에서 중요한 바탕이며 테마로 선택한 지리산을 매일 같이 대하면서 일상 속에서 겪고 성찰하려는 성실하고 진중한 사람의 이미지가 연상된다. 그가 선택하고 따르는 자연주의자의 깊이 있는 삶은, “자연은 곧 만물의 본성이며 그 안에 길이 있고 정신이 있다”는 신심이 두터운 성찰자의 자세를 그려보게 하는데 그것들이 작품 속에 어느 정도는 배어있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그의 지리산에서의 일기. 이 기록을 지리산을 곁에 두고 보고 느끼는 삶을 사는 작가의 소소한 기록쯤으로 정리할 수 있을까? 아마 작가는 일상의 소중함을 아는 이로서 느끼는 지리산에서의 일상을 은연중에 자랑하듯 그려내고 있는 중일 수도 있다. 그리고 대상의 무거움과 상관없이 그에게 주어진 삶의 기록, 지리산을 매개하거나 중심으로 한 일상의 의미에 대한 그의 탐구와 몰입의 힘은 여전히 쌓여가는 중일 것이다.
남들에게는 언감생심(焉敢生心)일 지리산을 동네 뒷산으로 두고 사는 사람이 누리는 삶의 특별함은 아무리 아무렇지 않은 듯해도 드러나기 마련일 것이니, 티를 내지 않아도 어느 순간 그대로 드러나는 법이다. 그래서 그의 천연덕스러운 지리산 일기는 굳이 수묵풍경화라고 미리 길을 알려주어도 사람들은 자기만의 심상을 덧붙이며 읽어내려 할 것이다. 그러므로 있는 그대로를 꾸밈없이 보여주려고 하는 것만으로도 매우 특별한 기록이며 의미가 될 것이라 생각해 본다.(강화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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