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을 담고 인생을 담는 추억’

부제 : 21세기에 만학 이야기를 전하는 20세기 샐러던트

by 강효숙

26. 길은 모든 것을 기억한다.

길은 침묵 속에 모든 발자취를 품는다. 지나간 날들의 숨결과 말없이 흘린 눈물과 웃음까지도 시간의 곁에 따라 조용히 각인되어 간다. 그 길을 다시 걷는 순간, 우리는 기억보다 더 깊은 감각- 마음의 주름 속에 새겨진 존재의 흔적을 마주하게 된다.

길은 단순한 통로가 아니다. 그것은 삶을 통과한 우리 자신의 이야기이자, 시간과 마음이 만나는 조용한 기록이다.

어떤 길은 참혹한 이별의 끝에서 시작되고, 또 어떤 길은 설렘과 약속을 가슴에 품은 채 이어진다. 우리는 걸으며 잊고, 또 걸으며 기억한다. 사람이 떠난 자리에는 그가 남긴 체온이 남아 있고, 다짐을 품고 걸은 자리는 발걸음마다 단단한 흔적을 남긴다.

때때로 길은 말이 없다. 그러나 조용한 그 무언은 우리가 놓치고 지나친 마음의 조각들을 다시금 들려준다. 계절이 바뀌고 풍경이 달라져도, 그 길을 걷는 이의 눈빛과 발걸음은 언제나 그 시절의 감정과 교감한다. 길은 우리보다 오래 기억한다.


우리가 외면했던 순간들마저도 묵묵히 간직하며, 어느 날 문득, 바람 한 자락, 낙엽 하나로 그날의 감정을 되살려 놓는다.

그래서 길을 걷는 일은 단지 이동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과의 대면이며, 잊고 지냈던 삶의 일부를 되찾는 귀환이다. 길이 모든 것을 기억한다는 말은, 결국 우리가 살아낸 모든 시간이 어디에도 사라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것은 누군가에게 잊힌 존재라 해도, 세상 어딘가의 길 위에는 그 이름 없는 사랑, 고독, 인내가 여전히 남아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의 삶이 던져놓은 조각들은 길 위에서 다시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우리는 또 걷는다. 길과 함께 기억하고, 길을 따라 자신을 만난다.

길을 걷는 일은, 단지 어디론가 가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나를 향해 되돌아가는 일,

묻어둔 마음을 조용히 꺼내어 마주하는 일이다. 길이 모든 것을 기억한다는 말은 우리가 잊었다고 해서, 삶이 사라지는 건 아니라는 뜻이다.

그날의 숨결, 그 밤의 떨림, 이름도 남기지 못한 사랑과 인내의 시간이 여전히 어딘가, 이 땅의 길 위에 남아 있다는 뜻이다. 흩어졌던 순간들은 길 위에서 다시 모이고,

잊힌 감정은 바람과 함께 되살아난다. 그리고 우리는 알게 된다. 살아낸 시간은 모두,

그 자체로 한 편의 서사였다는 것을... 우리는 다시 걷는다. 때로는 느리게, 때로는 고요히. 길과 함께 기억하고, 길을 따라 나를 만난다.

길은 잊지 않는다. 한 사람의 무게, 스치던 바람, 꺼내지 못한 말들까지도 모두 자신의 결 속에 침전시켜 언젠가 그 걸음을 꺼내 놓는다.

길은, 기억의 가장 오래된 증언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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