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을 담고 인생을 담는 추억,

부제 : 21세기에 만학 이야기를 전하는 20세기 샐러던트

by 강효숙

89. 고독

고독은 하나의 얼굴을 갖지 않는다. 같은 시간을 살고 같은 하늘을 보아도, 사람마다 고독이 향하는 방향은 다르다. 누군가는 충분히 잘 살아 있으면서도 설명할 수 없는 쓸쓸함에 잠기고, 누군가는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서도 홀로 남겨진 듯한 공허를 느낀다. 잘 살아낸 하루 끝에서도 고독은 찾아온다. 경제적으로 부족하지 않고, 가족이 곁에 있으며, 특별한 불행이 없을 적에도 마음 한편이 비어 있는 순간이 있다. 그것은 결핍의 고독이 아니라, 의미의 고독이다.

어려움 앞에서 해결하지 못할 때의 고독은 더욱 날카롭다. 문제는 분명히 존재하는데 손에 잡히는 해답이 없을 때, 사람은 세상과 단절된 느낌을 받는다. 도움을 청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설명해도 이해받지 못할 것 같아서 침묵을 선택할 때, 고독은 깊어진다.


자식과의 서운함에서 오는 고독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다. 사랑이 줄어서가 아니라, 사랑의 방향이 달라졌음을 인정해야 할 때, 찾아오는 감정이다. 이제는 보호자가 아닌 존재가 되었음을 깨닫는 순간, 부모는 자신도 모르게 한발 뒤로 물러난 자리에 서게 된다. 이해하려 애쓰지만 이해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 그 고독은 더욱 묵직해진다.

소외에서 오는 고독은 사회적이다. 말이 오가는 자리에서 의견이 지워지고, 관계 속에 있으나 역할이 사라질 때, 사람은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사람’이 된다. 이 고독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시대와 구조가 만들어내는 감정이다.

현재의 삶은 갈등으로 가득 차 있다. 속도를 요구하는 사회, 성과로 평가되는 인간관계, 끝없이 비교되는 기준 속에서 청년들은 쉽게 말하지 않는다. 아픔이 없어서가 아니라, 말해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학습을 먼저 했기 때문이다. 불안정한 미래, 끊임없는 비교, 노력과 결과가 연결되지 않는 현실 속에서 그들은 조용히 자신을 밀어붙인다. 겉으로는 괜찮아 보이지만, 내면은 늘 긴장 상태에 놓여 있다. 어른들은 종종 청년의 고통을 단순화한다. 조금 더 참으면 된다고, 예전에도 다 그렇게 살았다고 말한다.


청년의 고독은 인내의 부족이 아니라, 기대할 곳이 없다는 감각에서 비롯된다. 실패보다 두려운 것은 방향을 알 수 없는 삶이다. 청년의 고독은 울음 대신 침묵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말없이 시작된 고독은, 시간이 흐르며 다른 얼굴을 갖게 된다. 청년의 고독은 중년의 무게로 이어지고, 그 무게는 다시 노년의 성찰로 옮겨간다. 고독은 특정 세대의 문제의 아니라, 삶 전체를 관통하는 정서다.

중년의 고독은 갈등의 한가운데에서 형성된다. 위로는 책임이 있고, 아래로는 보호해야 할 삶이 있으며, 그 사이에서 자기 자신은 가장 뒤로 밀린다.


중년은 흔히 가장 안정된 시기로 보이지만, 실상은 가장 많은 것을 동시에 감당해야 하는 시기다. 이 시기의 고독은 현실적이고 날카롭다. 경제적 부담, 관계의 피로, 기대와 현실의 틈은 하루하루를 버티는 일로 만든다. 약해질 수 없다는 자각은 감정을 억누르게 하고, 말하지 않는 습관은 고독을 더 깊게 만든다. 중년의 고독은 외로움이라기보다 많이 무너지지 않기 위해 홀로 서 있어야 하는 고통에 가깝다. 중년은 선택의 결과가 타인의 삶에 닿아 있기 때문이다. 그 사이에서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소진된다.

노년의 고독은 다른 결을 띤다. 관계는 줄어들고, 역할은 사라지며, 속도는 느려진다. 이는 상실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정리의 시간이다. 이제는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자리에서, 사람은 비로소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 무엇을 지켜왔고, 무엇을 놓쳤으며, 어떤 마음으로 여기까지 왔는가를 조용히 정하는 시간이다. 침묵은 공허가 아니라 깊이가 되고, 혼자 있는 시간은 외로움이 아니라 사유의 공간이 된다. 노년의 고독은 삶의 마지막을 품위 있게 만든다.

신앙은 고독을 제거하지 않는다. 고독을 견딜 수 있게 만들고, 의미로 해석할 수 있게 한다. 삶의 문제를 고독의 한가운데서 내가 완전히 혼자가 아니라는 감각을 회복시킨다.


청년의 고독 속에서 신앙이 질문이 되고, 중년의 고독은 신앙이 버팀이 되며, 노년의 고독은 신앙이 고백이 된다. 고독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삶은 외로움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 외로움에 삼켜지지 않게 한다. 결국 고독한 삶이 문제가 아니라, 고독을 대하는 태도가 삶을 결정한다. 고독을 품고, 해석하고, 신앙 안에서 조용히 건너가는 사람의 인생은 나이가 들수록 더욱 깊고 단단해진다.

고독은 비어 있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가장 정직해지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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