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순간을 담고 인생을 담는 추억,

부제 : 21세기에 만학 이야기를 전하는 20세기 샐러던트

by 강효숙

88. 이별

이별은 언제나 먼 곳에 있는 사건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만남을 축복처럼 여기며 살아가지만, 그 모든 만남의 끝에 이별이 놓여 있다. 친구와의 작별, 부모와의 헤어짐, 남편과의 이별, 마침내는 나 자신과의 작별까지_

이별은 삶의 가장 정직한 얼굴이다.

가장 먼저 다가오는 이별은 말없이 찾아온다. 어느 날, 함께 웃던 친구의 목소리가 기억 속으로만 남고, 늘 곁에 있을 것 같던 부모의 손이 사진 속에서만 따뜻해진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깨닫는다. 사랑한다는 것은 곁에 있는 동안만이 아니라, 떠나보낼 준비를 함께하는 일이라는 것을.

부부의 이별은 또 다른 깊이와 고독을 남긴다. 함께 쌓아 올린 시간이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너무 오래 쌓였기에 더 무겁게 가슴에 내려앉는다. 같은 공간에서 다른 방향을 바라보게 될 때, 혹은 한 사람이 먼저 삶의 무대에서 퇴장할 때, 남겨진 이는 사랑의 부재보다 함께였다는 사실의 잔향에 더 오래 머문다.

가장 아픈 이별은 어쩌면 자식과의 이별일지도 모른다. 부모는 자식을 품고 키우지만, 결국 자식의 인생에서는 한 장면으로 남는다. 언젠가 우리는 부모가 아니라 기억으로 남겨질 존재가 된다. 자식의 삶에 짐이 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조금씩 뒤로 물러나는 법을 배운다. 사랑이란 붙잡는 것이 아니라 조용히 놓아주는 용기임을 그때서야 알게 된다. 이 모든 이별의 끝에는 결국 나 자신과의 이별이 기다리고 있다.

젊음과의 이별, 역할과의 이별, 이름과 직함과 책임으로 규정되던 나와의 작별.

그 앞에서 인간은 한없이 고독해진다. 아무리 많은 사람을 사랑했어도, 마지막 같은 혼자 건너야 한다는 사실 앞에서 우리는 침묵하게 된다.

하지만 성숙한 이별은 절망이 아니다. 이별은 준비하는 내면은 삶을 더 깊이 사랑하게 만든다. 오늘의 말 한마디를 아끼지 않게 하고, 오늘의 손길을 미루지 않게 한다. 언젠가 헤어질 것을 알기에, 우리는 지금의 온기를 더욱 소중히 붙든다.

젊은 날의 나는 이별을 상실이라 불렀지만, 지금의 나는 이별을 순서라고 부른다. 삶이 우리에게 허락한 가장 마지막 배움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수록 사람은 점점 더 많은 작별을 경험한다. 친구의 빈자리는 전화기 속 이름으로 남고, 부모의 부재는 명절의 공기에서 먼저 느껴진다. 살아온 시간만큼 이별도 늘어나지만, 그 무게는 전혀 가벼워지지 않는다. 오히려 마음이 성숙해질수록, 그 슬픔은 더 또렷한 색으로 가슴에 내려앉는다.

부부로 살아온 세월은 사랑이 얼마나 많은 이별의 연습으로 이루어져 있는지를 알려준다. 서로의 젊음과 작별하고, 각자의 꿈과 타협하며, 말하지 않아도 알던 시절과도 헤어진다. 그러다 어느 날, 한 사람이 먼저 하나님 품으로 떠나거나 혹은 삶의 방향이 달라질 때, 남겨진 이는 사랑보다 함께 견뎌온 시간을 더 그리워하게 된다.

부모로서 겪는 이별은 기쁨과 슬픔이 동시에 깃든 독특한 고통이다.

자식은 부모의 품에서 자라지만, 부모는 자식의 인생에서 점점 작아진다. 언젠가 우리는 조언하는 존재가 아니라 기도하는 존재로 남고, 마침내는 자식의 기억 속 한 장면으로만 머문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은, 사랑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완성하는 과정임이 늦게서야 배웠다. 나 자신과의 이별 앞에서 인간은 가장 솔직 해진다. 건강, 역할, 이름, 필요함에서 벗어나 오직 한 사람으로 서게 되는 순간. 신앙은 그 고독을 두려움이 아닌 귀향으로 바꿔준다.

하나님 앞에서의 이별은 끝이 아니라 정리다. 이 땅에서 맡았던 역할을 내려놓고, 충분히 사랑했고, 애썼음을 조용히 고백하는 시간이다. 이별을 준비하는 내면은 삶을 더 단단하게 만든다. 쓸쓸함은 공허가 아니라 깊이가 되고, 비애는 연약한 이들을 이해하는 능력이 되며, 아름다운 침묵으로 남긴다. 언젠가 떠날 때,

누군가의 삶에 상처가 아니라 조용히 따뜻했던 한 계절로 기억되기 위해. 한 사람의 인생이 얼마나 깊고 성실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아름다운 고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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