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 21세기에 만학 이야기를 전하는 20세기 샐러던트
87. 옷은 내면을 말한다.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옷을 갈아입는다. 아침에 외출복을 고르고, 저녁에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는다. 계절이 바뀌면 옷장도 따라서 변한다. 누구나 입는 옷이지만, 옷은 단순히 몸을 가리는 천 조각이 아니다. 때로는 말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한다. 옷은 우리의 마음을 덮고, 우리의 내면을 밖으로 비춘다.
나는 종종 사람들의 옷차림을 보며 그 속에 담긴 마음의 결을 읽으려 한다. 고요한 색을 좋아하는 사람은 흔히 자신의 감정을 조용히 품고 가는 사람이다. 화려한 무늬를 즐기는 이는 세상과의 만남을 주저하지 않는 사람이며, 늘 다림질된 셔츠를 입고 있는 사람은 마음속의 질서를 지켜내려는 성실함을 품고 있다.
옷은 내면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내면을 바꾸는 힘도 있다. 우울한 날에도 차분한 색의 코트를 걸치면, 마음의 파도가 잔잔해지는 순간이 있다. 중요한 만남을 앞두고 잘 다려진 재킷을 입으면 자연스럽게 어깨가 펴지고 목소리에 힘이 실린다. 옷은 내면의 반영이지만, 때로는 약해진 마음을 지켜주는 갑옷이 되기도 한다.
우리가 옷을 고르는 것이 아니라, 옷이 우리 마음을 세워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의 옷차림을 보며 그들의 내면을 짐작할 때가 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이다. 내가 어떤 옷을 입는가를 생각하는 일은 ‘내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를 생각하는 일과 닮았다. 단정함을 선택한다면 마음의 질서를 세우려는 것이다. 따뜻한 색을 고른다면 누군가에게 온기를 건네고 싶은 마음일 것이다. 빛나는 색을 입는다면 삶의 무게 속에서도 잃고 싶지 않은 희망을 지키려는 의지일 것이다.
옷은 오늘의 나를 결정하는 조용한 고백이다. 옷은 말이 없지만, 내가 어떤 마음으로 살고 싶은지 가장 먼저 들여다보는 친구라는 것을.
중년과 노년에 이르면, 옷은 단순한 외양을 넘어 삶의 서가에 꽂힌 한 권의 오래된 책처럼 느껴진다. 표지는 낡아가지만, 그 안에는 세월이 빚어낸 문장들이 고요하게 자리하고 있다. 옷깃 하나에도 지난날의 선택들이 스며 있고, 천의 주름 사이에는 흘린 눈물과 견뎌낸 계절의 흔적이 깊게 배어 있다.
나는 중년의 옷차림이 좋아졌다. 화려하지 않아도 좋고, 남의 시선을 굳이 잡아끌지 않아도 좋다. 대신 한 벌의 단정한 코트가 내 삶의 질서를 붙잡아 주고, 오래된 스웨터가 세상 풍파 속에서도 나를 잃지 않게 붙들어 준다. 젊은 날에는 옷이 나를 꾸며주었다면, 이제는 내가 옷을 지켜주려 한다. 옷은 단지 입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살아온 방식이 담긴 조용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노년에 들어서면 옷은 더욱 고풍스러운 의미가 있다. 마치 시간의 안쪽에서 건져 올린 오래된 향수처럼, 은근한 품위를 풍긴다. 화사함 대신 깊이를 택하고, 과시 대신 절제를 선택한다. 그 절제 속에는 세상을 향해 서두르지 않겠다는, 그러나 멈추지도 않겠다는 묵직한 결의가 담겨 있다. 노년의 옷차림은 어쩌면 한 사회의 오래된 고전과도 같다. 시대가 바뀌어도 사라지지 않는 가치, 무엇이 중요하여진 지 오래전에 깨달은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잔잔한 위엄이 배어 있다.
나는 자주 느낀다. 문학적 삶이야말로 나를 지켜주는 마음의 장막이고, 책장을 넘기듯 천천히 하루를 살고, 옷깃을 세우며 바람을 견디는 마음으로 계절을 건너고, 단정한 색을 걸치며 내면을 다잡는 이러한 태도는, 흔들리는 시대 속에서도 나를 잃지 않게 한다.
삶은 종종 소란스럽고 빠르지만, 고전이 시간을 견뎌온 것처럼, 단정한 품위는 사람의 마음을 오래 지켜준다. 그것은 화려한 날보다. 흐린 날에 더 힘을 발휘한다. 마음이 흔들릴 때, 나는 오래 아껴 입던 코트를 걸치며 스스로 속삭인다.
“이 또한 지나간다.” 나는 이미 많은 시간을 걸어왔고, 또 걸어갈 것이다.
옷은 결국 하나의 이미지다. 그러나 그 이미지는 내면을 보듬는 오래된 등불이기도 하다. 지나온 시간을 귀하게 여기고, 남은 날들을 성실히 이어가려는 사람에게 옷은 단지 곁을 꾸미는 것이 아니라 삶의 품격을 다지는 장치가 된다.
문학적인 삶, 고풍스러운 마음, 오래된 가치를 잃지 않으려는 선택들.
이 모든 것이 나를 지키고, 나의 미래를 지탱하는 다리다.
옷은, 그 다리를 꿋꿋이 건너게 해주는 세월 속에서 얻는 가장 조용하고도 품위 있는 동반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