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의 뜻을 안다는 나이 지천명을 지나, 귀가 순해져서 다른 사람의 어떠한 이야기도 이해할 수 있다는 이순을 바라보는 시점이 되고 보니 살면서 죽을 고비를 세 번 넘기지 않은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30세까지만 해도 내가 겪은 세 번의 죽을 고비는 나에게만 있었던 특별한 이야기라고 철석 같이 믿고 살았었다. 그래서 세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으니 난 오래 살 거라고 믿었다. 물론 지금도 그 말을 믿고 있다.
내 기억 속의 첫 번째 죽을 고비는 다섯 살 때이다.
다섯 번째 생일을 지난여름에 난 홍역에 걸렸었다. (사실 나는 내가 홍역이었는지는 알지 못하였지만 엄마한테서 들은 나의 병명이 홍역이었다고 한다.) 부모님은 제대로 약도 쓰지 못한 채로 몸이 불덩이가 된 나를 그저 하늘이 살려 주기만을 바라고 있었다고 한다.
내가 기억하는 것과 우리 엄마의 당시의 기억을 이야기로 풀어 보면 다음과 같다.
부모님 두 분이 누워있는 내 머리맡에 근심 어린 얼굴로 앉아 계셨다.
날 내려다보고 머리를 만져보곤 하시다가 엄마가 훌쩍이시며 그릇에 물 같은걸 가져오셨다.
수저로 떠서 입에 넣어 주는데 아무런 맛도 느끼지 못했다. 사실은 그 물을 삼켰는지도 기억이 없다. (나중에 알고 보니 매운맛이 나는 식혜였다. 식혜를 끓일 때 매운 고추 몇 개를 같이 넣어서 끓인 것이라고 했다.) 약이 없으니 대신 무엇이라도 먹여 봐야 한다는 엄마의 생각이셨던 것 같다.
엄마가 떠주는 식혜 몇 술을 받아먹고 잠이 든 나는 엄마의 심부름을 가게 된다.
오빠를 찾아오라는 심부름이었다. 난 일어나 문을 열고 나갔다.
밖에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밤이었는데 우산도 없이 오빠를 찾으러 마냥 걸었다.
한참을 가도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무섭다는 생각보다 오빠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만 들었다.
이리저리 걷다 보니 지붕이 무덤처럼 생긴 둥글둥글 한 집들이 보였고, 그곳의 경계를 서고 있는 아저씨들이 보였다. 한참만에 아저씨들을 만난 나는 반가운 마음에 얼른 뛰어갔다.
"아저씨, 아저씨~"하고 부르며...
“넌 누구냐? 여기는 왜 왔냐?” 하고 나를 본 아저씨들이 물었다.
“저 동네에 사는 효정인데요. 엄마가 오빠 찾아오래요” 하고 답했고 위아래로 훑어보던 아저씨들은
“네 오빠 여기 없으니 얼른 엄마 한 테로 가라"며 야단을 치셨다.
난 "오빠 안 찾아 가면 엄마한테 혼나는데..." 하면서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는 땅이 흠뻑 젖어서 질퍽질퍽했다. 깜깜한 길에 주변의 모습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 집은 제대로 보였다. 오빠도 못 찾았으면서 흙 묻은 발로 들어가면 엄마한테 혼날 거라는 걱정을 하며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엄마 오빠 없대" 하면서 얼른 자리에 누웠다.
그 말을 들은 엄마는 "아이고 여보 얘가 깨어났나 봐요" 하며 아버지를 불렀다.
아버지도 돌아보며 내 머리를 만져보시고 이마의 땀을 손으로 훔쳐 주시며 뭘 좀 먹이라고 하셨다.
엄마는 다시 매운 물을 먹이셨고 나는 또 잠이 들었다.
그렇게 홍역을 앓고 일어난 나는 몇 년 후 그날 엄마의 심부름이 생각났다.
"그때 오빠 찾아오라고 해서 나갔다가 발에 흙을 잔뜩 묻히고 들어 왔었는데 엄마 기억나?" 그리고 "왜 아픈 애한테 심부름을 보냈었어?" 하고 물었다.
엄마는 '얘가 뭔 소리를 하는겨~' 하는 표정으로 "열이 펄펄 나서 정신을 잃고 헛소리만 하길래 죽을 거라고 포기하고 있었는데 무슨 심부름을 시켰겠냐?"라고 하셨다.
난 잠만 자고 있었고 밖에 나가서 발에 흙 묻히고 들어오기는커녕 밖에 나간 적도 없었다고 하셨다.
아마도 내 혼이 나가서 저승길을 가려고 나섰다가 다행히도 저승문을 지키고 있던 아저씨들한테 집으로 가라는 이야기를 듣고 돌아와서 살아나게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때 둥그런 지붕의 집들을 지키고 있던 그 아저씨들은 아마도 저승의 문지기들이 아니었나 싶다.
다섯 살 어린 나이였지만 그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 기억 때문인지 저승길은 질퍽질퍽하고 어두운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약하나 쓰지 못하는 홍역에도 굴하지 않고 살아난 그때의 다섯살 아이는 이후, 가난으로 인한 많은 고통의 시간들을 보내지만 결국은 세월이 다 해결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