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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이 몰고 온 나의 죽을 고비

내가 살아있는 이유를 생각하다

by 강현숙

나는 20살 이전에 크게 죽을 고비를 세 번 넘겼다. 그 옛날 1980년 이전에는 약도 흔하지 않았고 병원에 달려갈 만큼 돈도 흔하지 않았다. 그래서 죽을 고비를 몇 차례씩 겪은 사람이 적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그런데 굳이 내가 겪은 죽을 고비가 특별한 듯 이야기를 하는 것은 바로 가난 때문에 겪은 일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고향 친구들은 모두 부모 밑에서 안전하게 학교에 다닐 시기에 나는 고사리 손으로 돈을 벌겠다고 삭막한 서울에서의 생활을 이어가고 있을 때였다.


16살 겨울이었다.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일 년만 묵었다가 다음 해에 중학교에 가라는 아버지 말씀에 잠시 집에 머물던 그때에 고모집 언니들이 서울에서 돈을 잘 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언니들이 번 돈으로 논을 사서 쌀 걱정 안 하고 산다는 이야기를 들은 나는 서울만 가면 돈이 저절로 벌어지는 줄 알았다. 그래서 고모를 조르고 우리 부모님을 졸라서 서울에 갔다. 금방 부자가 될 꿈에 부풀어 올라간 서울에선 처음부터 서러움 덩어리였다. 너무 어린 나를 데리고 왔다고 고종 언니도 사장님 한테 혼나고 사장님 부부가 도로 내려 보내자는 이야기를 하는 걸 들으며 난 눈치가 보여 울고 말았다. 울며불며 무슨 일이든 잘할 수 있으니 제발 집으로 보내지만 말아달라고 애원을 했다.

나의 그런 태도에 사장님 부부는 불쌍해 보였던지 고종 언니에게 데리고 가서 재우고 공장 가서 북실이라도 감게 가르쳐서 데리고 있으라고 했다. 그렇게 시작된 서울생활의 3년이 되었을 때다.


1970~80년대는 나무를 때던 불편함에서 벗어나 좀 더 간편하고 깔끔한 연탄으로 난방과 조리를 겸하는 시설로 주방이 바뀌어가던 시기였다. 그러나 모든 것에는 양면성이 있었으니 편리함 대신 가스중독이라는 위험을 감수해야만 했는데 그 가스중독 사고가 흔하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연탄가스를 마시면 특별한 약도 없었던 지라, 연탄가스중독으로 사망하는 사례가 자주 들려왔다. 연탄가스에 중독되면 창문을 열고 김치 국물이나 사이다 같은 탄산음료로 응급처치를 대신했다. 그중에서도 김치 국물이 최고의 처방이라는 말이 돌던 시기였다.


숙소로 사용하던 사장님 댁도 연탄으로 난방을 했었는데 우리가 잠자는 방바닥 구멍으로 잠들기 전에 갈아 넣은 연탄이 피어오르면서 방으로 연탄가스가 새어 들어왔고, 그 가스를 함께 잠자던 6명 중 나만 마시고 정신을 잃었다. 혼수상태인 나는 얼마나 괴로웠던지 몸부림을 치고 있었고, 그런 나를 사장님이 등 뒤에서 붙들고 있었다. 사모님은 내게 김치 국물을 먹이고 있었으며, 언니들은 토악질을 해대는 내 얼굴 아래로 세숫대야를 대고 있었다. 김칫국물을 억지로 먹이면 토하고, 토하다가 기절하고를 반복하던 나는 서서히 정신이 돌아왔다. 이미 다 토해버려 더 나올 것도 없는 속해서는 계속해서 토악질이 나왔다. 한참을 토하고서 기진맥진하여 잠이 든 나를 두고 모두들 일터로 가서 더 이상 나를 건사해 주는 사람 없이 하루 종일 기절한 듯 잠만 잤다.


누군가 죽이라도 끓여서 먹을 수 있게 해 주었더라면 좀 더 일찍 기운을 차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지만 다 같이 어려운 시기였기에 위기는 넘겼다고 판단되니까 모두들 일터로 나갔던 것이다.

지금이라면 아마도 며칠은 입원해서 산소호흡기를 달고 있어야 될 상황이었던 것 같은데 말이다.


아무도 더 이상 챙겨 주지 않았어도,
아직 더 살아야 할 이유가 있었던지 질긴 목숨은 끊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날 휘청거리며 공장으로 가서 일을 했다.
하루도 일을 안 하면 먹고사는데 곤란하다는 것을
그 어린 나이에 이미 알고 있었다.



가난이 몰고 온 죽을 고비, 그 고비에서 살아난 나는 생각했다. 기어이 살아서 가난을 벗어나겠다고, 하지만 결코 쉽지 않았다. 나는 그 후로도 계속 가난했고 불행했다. 불행하다고 생각하면 할수록 불행의 깊이는 깊어졌다. 40이 넘어서 였다. 가난한 부모를 원망하는 마음이 가슴속에 굳어져 있던 시기에 거주지를 바꾸면서 다니던 사찰을 옮겼다. 그곳에서 만난 스님은 내 고통을 들으시고 인과응보와 전생의 업에 대해서 설명해 주셨다. 가족이 되는 것은 그러저러한 비슷한 업을 가진 사람들이 만나는 것이고 그 업보를 소멸하지 않으면 고통은 계속될 거라고 하시면서 업장소멸엔 절하는 것이 최고라고 하셨다. 돈 들여 기도하려는 생각도 말고 그저 부처님 앞에서나 집에서나 어디든 마음이 힘들어질 때마다 절을 하라고 하셨다. 스님은 꼭 그렇게 하라는 것도 아니고 마음이 내키면 하라는 이야기를 해 주셨는데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돈 드는 거 아니니까 한번 해보자는 마음이 생겼다.


작정을 하고 절을 하기 시작했다. 절에 가서는 물론이고 잠들기 전이나 아침에 일어나서도 절을 했다. 그냥 생각 없이 절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가슴속 응어리가 풀어진 것을 느꼈다. 절을하면 업이 녹는다는말을 믿고서 행했던것이어서인지 마음이 편안해졌다. 가난한 부모가 못내 원망스러웠던 마음이 내 업때문에 그런부모를 만난것이라 생각하니 내가겪는 가난과 고통이 모두 내탓으로 느껴졌다. 부모님을 뵈러 가도 거부감이 생기지 않았다. 나를 꼭 닮은 딸이 투정을 부려도 밉지가 않았다. 그렇게 나는 마음을 비울 수 있었다.



그 외에도 버스에 치일뻔한 사건도 있었고, 저녁 한 끼를 굶고 혼절한 사건도 있었고, 사춘기 시절 자살의 충동을 느끼기도 했었지만 정말 저승 문 앞까지 갔었던 일은 크게 세 번이었던 것 같다. 내가 당했던 죽을 고비를 돌아보며 사람 목숨이 어떠한 상황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 정한 기한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거의 똑같은 사고가 있어도 사망자가 있는 반면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멀쩡한 사람도 있으니 말이다. 가끔씩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불가의 말씀 중에는 자살하는 업보가 무엇보다도 크다고 한다. 하늘이 정해진 명이 다하면 스스로 끊지 않아도 이승을 떠날 수밖에 없다.


내가 겪은 세 번의 죽을 고비를 돌아보면서, 하늘이 다시 준 기회라고 생각한다. 세 번 죽다가 살아났으니 네 번을 태어난 셈이다. 세 번 씩이나 죽음의 문턱에서 돌려보낸 이유가 있을 것 같다. 하늘의 그 뜻이야 알 수 없지만, 가난 때문에 힘들어했던 나를 살린 것은 아마도 가난이라는 거 한번 이겨보라는 의미가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하늘이 내린 선물이라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서 살았다. 마음속에 누군가를 향한 원망이 싹트려 할 때는 절을 했다. 지금도 나는 수시로 백팔배를 한다.


지금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은 하면서 살 수 있을 만큼 형편이 좋아졌다. 지금까지 오면서 겪었던 고난 같은 것은 추억으로만 남아있다. 누군가에게 내가 수시로 절하는 이야기를 하면 불교에 완전히 빠져 버린 사람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한 달에 두 번 있는 법회에도 참석하지 못한다. 일해야 한다는 핑계가 항상 있어서 부담 없이 참석하지 않을 수 있다. 다만 절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 이유는 내 온몸을 가장 낮은 바닥까지 낮추려는 마음이다. 나를 낮추었을 때 비로소 운명은 한 단계 한 단계 올려 주었다. 낮은 마음으로 사는 것, 그 마음을 잃지 않기 위해서 절하는 것읊 멈추지 않는다.


지금의 내 생명은 몇 번의 죽을 고비들을 넘기고 살아있는 것이니 함부로 살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오늘도 힘낼 수 있다. 그리고 인간으로서 좀 더 유익한 존재가 되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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