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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쯤 돌아가고 싶은 그 시절

목화 열매, 잊지 못할 그 맛

by 강현숙

사랑하는 동생아!

너 그때 생각나니?

언니가 9살, 네가 7살이었는데....

그러고 보니 벌써 50년 전의 일이구나!


그때는 우리가 논산 노성면의 장마루라는 곳에 살 때였어, 그때는 어른들이 장마루라고 하니까 그렇게 따라 불렀지만 정식 행정명칭은 노성면 호암리였던 것 같아, 집에서 10여 리 떨어진 곳에 호암저수지가 있었지, 저수지 주변의 마을 이름은 병사리였고 잘 가꾸어진 묘소와 커다란 집들이 있었어, 그곳으로 소풍도 가고 그러면서도 그곳이 그때는 유명한 곳인 줄도 몰랐었지.


성인이 되어서 알고 보니 그 저수지 주변은 논산의 유명한 문중인 파평 윤 씨의 땅이더라. 우리가 소풍으로 가서 신나게 뛰어놀았던 커다란 묘소는 논산 파평 윤 씨의 선산이더라고, 그리고 아버지가 즐겨 찾으시던 아버지의 낚시 포인트는 커다란 집과 사당이 있는 아래였잖아? 그 사당도 파평 윤 씨들의 것이고 사당 아래 높은 정자는 종학당이라고 부른다는데 그때는 어마어마해서 우리는 쳐다보지도 못했었지, 그런 위용을 갖추었던 그곳이 파평 윤 씨의 후손들이 공부하던 곳이었대, 그 아래가 아버지가 맡아놓고 낚시를 하시던 장소였잖아.

아버지가 계시던 그곳까지 가려면 큰길에서 야산으로 이어진 오솔길을 걸어가야 했는데 그 오솔길 주변으로 목화밭이 있었어. 지금 같으면 목화밭이 있건 말건 관심도 없었을 텐데, 그 시절 우리는 간식이라는 것이 따로 없어서 먹을 수 있는 것들은 무엇이든지 다 먹었던 것 같아, 한여름에 주먹만 한 열매가 주렁주렁 달린 목화는 항상 우리를 유혹해선 위험에 빠뜨리곤 했었어, 아직 어린 우리는 우리 거, 남 의거라는 개념을 잘 몰라서 그랬나 봐 그냥 지나다가 먹을 것이 있으면 먹으려 했고 배가 부르면 누가 먹어도 상관하지 않았으니까. 남의 것을 따먹고 엄마한테 혼나고 그러면서 우리가 손대면 안 되는 남의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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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동생아! 너 아니? 목화의 열매가 다 익어 솜이 되기 전에는 어느 과일 못지않게 달고 촉촉한 열매라는 걸, 한 잎 베어 물면 아삭한 식감과 함께 달달한 과즙이 입안을 흡족하게 했었잖아.


그 시절, 낚싯대나 담그고 세월만 낚으시는 아버지를 엄마는 왜 그리도 챙기셨나 몰라. 지금도 아버지 앞에선 순종적인 모습이 엄마의 타고난 성품 인지도 모르겠는데, 그때는 더 그랬던 것 같아. 아예 낚시터에 살림을 차리다 시 피한 아버지가 혹여라도 끼니를 굶으실까 봐 가끔씩 우리에게 도시락을 들려서 아버지께 심부름을 보내곤 하셨잖아. 우리도 참 철이 없었지 며칠 못 보던 아버지를 보러 간다는 마음에 그 먼길을 신나서 걸어갔었지, 그러면 아버지도 우리에게 대나무에 낚싯바늘이 달린 실을 묶어주며 놀게 하셨는데 신기하게도 낚싯바늘에 달린 밥풀을 먹으려고 작은 물고기들이 몰려들곤 했었어, 그렇게 우리가 잡은 작은 물고기들을 아버지는 말려서 집으로 가져오시면 엄마는 멸치를 볶듯이 양념에 맛있게 볶아주어서 먹기도 했었는데, 우리가 잡은 거라서 특별히 맛있었던 것 같아, 생각해 보니 참 행복했던 시간이었어.


그렇게 엄마의 심부름으로 봄부터 종종 다니던 길이었는데, 목화꽃이 피었을 때까지도 아무런 말썽도 없이 심부름만 잘하던 우리를, 어느 날 꽃이 지고 딱 먹기 좋은 크기로 자란 목화 열매가 유혹했지. 처음엔 한 개씩만 따먹자고 했었어. 그런데 뜨거운 뙤약볕을 받으며 10여 리를 걸어온 우리에게 한입의 목화 열매는 "맛있지?", "시원하지?" 하며 "더 먹어도 괜찮아", "너희는 아직 어리잖아", "어른들이 보아도 이해해 줄 거야"하며 자꾸만 발길을 붙잡고 있었어. 그래도 거기서 멈추었어야 했는데...


우리는 서로 눈치를 보며 몇 개를 따 먹고는 집에 돌아갈 때 먹으며 가자고 작은 주머니 속에 열매를 따 넣었지, 그때였어, 한 아저씨가 갑자기 나타나서는 호통을 치셨어, 땅주인에게 딱 걸렸다는 걸 눈치채고는 도망가려 하다가 주머니 속에 따넣은 목화 열매가 쏟아지고 말았지, 아저씨는 나를 붙잡았어, 너 라도 도망갔으면 좋았을 텐데 언니가 잡힌 것을 보고는 도망가는 대신 주저앉아 울어버렸지, 작은 언덕 하나만 넘으면 아버지가 계신데 네가 힘껏 울어도 그 소리는 아버지에게 닿지 않았어, 언니는 오히려 그런 상황을 아버지가 아시면 크게 혼날까 봐 네가 그만 울기를 기다렸지,


아저씨는 9살짜리 언니의 주머니를 다 뒤져서 한 개도 남기지 않고 빼앗아 버리셨고, 너도 가진 게 있으면 내놓으라며 윽박을 질렀어, 다행히도 넌 주머니가 없다고 몇 개 딴것을 언니한테 맡겨서 네 몸에선 한 개도 나오지 않았지, 그래도 그 아저씨 크게 나쁜 아저씨는 아니었나 봐, 열매를 모두 빼앗고는 다시는 따먹지 말라며 가라고 하셨어, 더 좋은 아저씨였다면 가다가 먹으라고 2개쯤 주셨을지도 모르는데ㅋ, 그 아저씨는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하셨던 같아.


그렇게 혼쭐이 나고 아버지의 도시락을 챙겨서 아버지께로 오면서 우리 목화 열매 따먹다 주인에게 들켜서 혼난 이야기는 하지 말자고 약속을 했는데 그 약속이 지금까지 지켜지고 있네, 그날 이후로 한 번도 그 이야기를 하지 않은걸 보면 우리 참 입이 무거운가 봐 ㅎ ㅎ


지금은 목화를 키우는 곳이 거의 없는 것 같지? 언젠가부터 목화밭을 본 기억이 안 나, 하긴 요즘엔 목화솜으로 옷을 짓거나 이불을 만드는 일이 거의 없으니까 심어도 다른 작물보다 수익성이 좋지는 않을 거야. 게다가 외국의 넓은 땅에서 대량으로 심은 목화가 필요한 곳을 충당하고 있으니 비싼 우리 땅에서 점점 사라지는 것이 당연한 것 같아.


좀 전에 냉장고를 열었다가 있는 줄도 모르고 방치해서 변해버린 과일들을 보았어. 귀찮아서 몽땅 버려버릴까 하다가 갑자기 그때 목화 열매가 생각났어. 어린것들이 비포장도로를 뜨거운 햇볕을 받으며 걸어왔으니 얼마나 목이 말랐겠니? 먼지도 많이 먹었을 거야, 그때 그 몰래 따먹은 목화 열매는 정말 맛있었지, 주인에게 혼나기는 했지만 그 열매가 우리의 갈증을 씻어 준 것은 확실해, 그 생각을 하니 쓰레기통으로 향하던 손길이 멈칫하는 거야, 그래서 아직 먹을 만한 귤 3개 하고 사과 1개는 얼른 씻고 손질해서 먹으려고 밀폐용기에 담아 식탁 위에 올려놓았어,


우리 그 시절 목화밭으로 다시 간다면 어떨까? 혼날지도 모르니 그냥 지나쳐 올 수 있을까? 아닐 거야 언니는 그래도 따먹을 것 같아 ㅋ ㅋ. 냉장고 속의 과일이 있는 줄도 몰라서 방치했다가 썩어 버릴 만큼 먹을 것이 흔한 세상을 살지만 그 시절, 그날의 목화 열매만큼 가슴속에 쌓인 갈증을 풀어주는 과일을 만나기는 쉽지 않은 것 같아. 그러니 어떻게 그냥 지나쳐 올 거라고 장담하겠니?


한번쯤 돌아갈 수 있다면 너와 같이 손잡고 가고 싶다. 이번에는 네게도 주머니가 달린 옷을 입혀 달라고 엄마께 말할게, 그 대신 한 개씩만 따먹고, 주머니에도 한 개만 넣어가지고 오자. 그러면 주인에게 들키지도 않을 거야. 그래서 살면서 풀리지 않는 갈증이 찾아올 때면 마음으로 아삭! 하고 깨물어 보는 거야, 어때? 생각만 해도 50년 쌓인 갈증이 해소되는 것 같지 않니?


사랑하는 동생아! 누군가 잠시 그 시절 목화밭으로 보내준다고 하면 꼭 언니랑 너랑 손잡고 함께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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