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49재, 그리고 천도재

영원한 이별의식

by 강현숙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여러 단계를 거쳐서 하늘의 재판을 받고 망자의 세상에서 쌓은 덕업과 죄업의 크기에 따라 다음 생의 무엇으로 어느 곳에 태어날지가 결정된다고 한다. 재판의 기간이 49일이므로 마지막 판결을 받기 전에 망자의 죄를 사해주고 좋은 곳에 태어나도록 선처해 달라는 후손들의 간절한 마음을 대변하는 의식이 49재라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사후 49일이 되는 날은 천도재(薦度齋)라는 이름으로 의식을 행하게 된다. 이날이 염라대왕으로부터 판결을 받아 이생에서 맺었던 모든 인연을 끊고 새로운 세계로 아주 떠나는 날 이라고 알려 주고 있다.

천도재의 천(薦)은 천거함을 의미하고, 도(度)는 죽은 영혼이 내생(來生)의 좋은 곳에 다시 태어나는 길을 안내하고 그 방법을 가르쳐 주며 이끌어 주는 법도를 말하고, 재(齋)는 몸과 마음을 정갈히 하여 좋은 기운이 망자와 인연 맺은 모든 이들에게 미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사람은 누구나 죽지 않을 수 없고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고 모든 것이 없어진다고 생각하지만, 불교에서는 지수화풍(地水火風)으로 인연 되어 생성되었던 몸은 지수화풍으로 흩어지고, 영혼만이 남아 업식(業識)에 따라 이 몸에서 저 몸으로, 사람에서 동물이나 미물로, 다시 사람으로 몸만 바꾸어 환생하면서 끝없이 윤회한다고 한다. 몸이 바뀌어도 혼은 변하지 않는 것, 그것을 영혼이라 하며, 그 영혼의 개체를 영가(靈駕)라고 부른다.

천도재는 영가를 불러 이승의 미련이나 집착을 끊어 버리라는 무상 법문(無常法門)을 들려주고 선신(善神)의 위신력과 부처님의 가피력으로 왕생극락(往生極樂)토록 안내하고 기원하는 의식이다.




이러한 의식을 내가 주체가 되어 행하게 될 것은 생각하지도 못했다.

살면서 인연 맺은 여러분들이 세상을 떠나셨지만 그때는 누구나 죽는 거니까, 운명이 거기까지니까 떠나신 거라고 마음 편한 생각을 했었다. 그때마다 상주이거나 고인과의 두터운 인연이 있는 분들이 얼마나 황망하고 아플지는 깊이 헤아리지 못하였음에 죄송한 마음이 이제야 든다. 겪어봐야 알고 그 또한 곧 잊어버리며 사는 어리석은 중생임을 부인할 수가 없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62세 오빠와의 갑작스러운 영원한 이별은 내게는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지나간 삶이 힘들고 아프기만 했다고, 나보다 더 힘들었고 아팠던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는 듯이 교만하게 살았던 내게 오빠는 '오빠도 힘들었어'라는 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돌아보면 오빠에게도 많은 아픔이 있었는데, 장남이면서 아들을 낳지 못한다고 부모로부터 눈총도 많이 받았다. 딸 셋을 낳고 풀이 죽어있던 올케는 어느 날 집을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올케가 두고 간 어린 딸들을 오빠는 혼자서 키웠다. 시간이 흘러 큰애와 둘째를 결혼시키고 막내는 어린이집 교사로 취직하여 모두 다 제 앞가림들을 하고 살게 되면서 그제야 오빠도 오빠의 세계를 펼치기 시작했다.


새언니가 다시 생기기는 했지만 얼마 못가 마음이 맞지 않는다며 헤어졌다. 그때도 나는 오빠를 이해하기보다는 양보하고 새언니와 잘해보려는 마음을 내어주지 않는 오빠만 원망했다. 오빠의 속으로 곪아 터지는 심정은 보이지 않았고 그래도 새언니가 있어 내가 신경 써야 할 부분이 줄어드는 것만 생각했다. 새언니가 가버리면 가까이 사는 내가 신경이 쓰여 편치 않을 것 같았다. 결국은 정리해서 새언니를 보내고 오빠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혼자된 오빠를 불편해하는 내게 '오빠는 잘 있단다'하며 항상 웃음을 보여 주었다. 그 웃음 뒤에 가려진 오빠의 아픔과 슬픔을 내 아집 때문에 전혀 보지를 못했다. 이런 일이 생기고 나니 오빠 생전에 보이지 않던 오빠의 슬픔과 외로움과 아픔이 너무나 선명하게 보인다. 시간이 갈수록 너무 미안하고 후회스럽다.


나보다 먼저 태어나서 오빠라는 이름으로, 장남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짐을 지고 살았던 오빠를 생각하면 그 삶이 너무나 안쓰럽기만 하다. 이렇게 빨리 떠날 줄 알았으면 조금이라도 오빠의 짐을 덜어주려 했을 텐데 한 치 앞을 모르니 나만 편하자고 오빠가 진 짐들을 모른 체하며 살았던 것이 스스로 용서가 안된다. 그렇게 눈감고 뜨지 않아야 비로소 무거운 삶의 무게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인지 삶에 대한 의욕도 주저하게 된다. 오빠도 나도 지나간 삶의 과정을 생각하면 너무나 안타깝기만 하다.


2021년 10월 5일은 오빠가 떠난 지 49일 되던 날이다.

오빠가 떠나던 날부터 긴 가을장마가 오락가락하며 울적한 마음을 더욱 움츠려 들게 하더니, 오빠를 천도하려 갔던 그날은 너무나 아름다운 가을 날씨를 보여주었다. 살면서 아름다운 가을 하늘을 어찌 쳐다보라고 그리도 아름다웠는지, 그 푸른 하늘 어디쯤에서 오빠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 것만 같았다.


이승과 저승에 있어 서로 만날 수 없는 오빠를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오빠의 극락왕생을 빌어주는 것뿐이었다. 불교에서 말하는 사후 최고의 경지인 윤회의 사슬에서 벗어나 불국정토로 들어가는 것, 그곳으로 인도해 달라고 마음을 모아 빌고 또 빌었다. 오빠가 간 곳이 어딘지는 아무도 알 수는 없지만, 어떤 수단 방법을 다 동원해도 다시 돌아올 수는 없으니, 부디 불교에서 말하는 극락세계로 들어가셨기를, 그래서 지금은 세상에서의 모든 미련을 다 버리고 편안해지셨기를 믿어본다.


불우한 환경이었지만 그 어두운 면을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큰소리치며, 휴대폰 벨소리도 '잘 살 거야~ 잘 살 거야~ 우리 모두 잘 살 거야~'라는 음악으로 잘살고싶은 자신의 마음을 대신 표현하며 살았던 오빠!

그 오빠의 기억은 이제 흰구름이 몽실몽실 떠다니는 이 멋진 10월의 하늘에 깊이 새겨지고 말았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흥정이 있어야 장보는 맛이 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