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방적 부설 중학교에 다닐 때 부반장을 했었고, 검정고시 학원에 다닐 때는 반장을 했었다.
초등학교 다닐 때는 줄반장 한번 해보지 못했지만 성적은 상위권이었었다.
그런 정도의 기억으로 과대표 또한 무난하게 수행해 낼 것을 자신했던 것이다.
그러나 방송대에서의 상황은 달랐다.
우선 학생들의 연령대가 반장이나 대표의 말을 순순히 들어줄 나이가 아니었다.
그리고 공부만 하는 전업 학생도 아니었다.
학교에서는 학과의 발전의 기준을 학우들이 행사에 어느 정도 참여하는지를 기준으로 삼았다.
학기초부터 잡혀 있는 각종 행사들에 과대표가 학우들을 대동하고 참여를 하여야 했다.
의무조건이 아닌 활동에 과대표가 마음에 안 들면 언제든지 거부할 수 있었다.
학우들의 참여를 독려하기 위하여 호불호를 극명하게 표현했던 나의 성격은 둥글둥글하게 변해 갔다.
싫어도 싫다는 표현을 하면 안 되었고 좋아도 좋다는 표현을 티 나게 하면 안 되었다.
다행히도 연배가 높은 학우님의 도움으로 1학년 과대표로서의 임무를 마친 나는 마음이 살짝 지쳐 버렸다.
2학년 때는 절대로 임원을 하지 않으리라며 단호하게 거부하고 공부만 하기로 하였다.
방송대에는 각종 장학금제도가 활성화 되어있다. 장학금을 받으려고 마음만 먹으면 어떤종류의 장학금이든 받을수 있을 정도로 다양한 장학금제도가 운영되고 있다. 몇가지만 살펴보면 임원장학금, 성적 장학금, 국가지원장학금, 방송대발전기금 장학금, 등이 내가 알고있는 장학금이다.
임원 장학금으로, 회장은 전액 장학금을 받는다. 부회장은 반액 장학금을 받는다. 그리고 성적으로는 평균점수 95 이상이면 전액 장학금을 받고, 90 이상이면 반액 장학금, 85 이상이면 일부 수업료 장학금을 받는다.
국가지원장학금은 공부하고자 하나 경제적으로 공부할 환경이 어려운 분들께 지원해주는 장학금이다.
방송대 발전기금장학금은 회장과 부회장이 아니면서도 학교나 학과에 열심히 봉사한 분들에게 주어진다.
남편한테 첫회 등록금을 받으며 나머지는 장학금으로 학비를 충당하기로 한 약속을 무시할 수 없어서 어떤 방식으로든 장학금을 받고 싶었다. 1학년 2학기와 2학년 1학기는 과대표를 한 덕분에 전액 장학금을 받았다.
2학년 2학기는 임원활동을 하지 않는 한 전액 장학금을 받기 위해서 평균점수 95 이상을 받아야 했다. 나는 공부만 한다면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
임원활동을 거부하고 2학년 등록을 마친 나는 홀가분한 기분으로 못했던 공부를 즐기고 있을 즈음 3학년 학회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이번엔 학과의 총무를 맡아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학점으로 전액 장학금을 목표로 하고 있던 나는 절대로 안 한다고 사양을 했지만 아무것도 시키지 않겠다는 조건을 믿고 그만 수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일단 맡으면 임무를 수행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성격 탓에 나는 또 임원으로서 임무수행을 위한 시간을 투자해야 했다.
그것도 1학년 과대표 때와는 다르게 학과의 일을 보아야 하니 더 많은 시간을 요구했다.
결국 공부도 제대로 못하고 학과 활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지도 못한 체 2학년 1학기를 보냈다. 성적은 겨우 85점을 넘겨서 수업료 장학금만 받았다. 나는 갈등했다. 확과를 위한 아무런 활동도 하지 않고 공부만 할 것인가? 아니면 활동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며 넓은 세계로 나아가는 발판으로 삼을 것인가? 고민하다가 공부하고 싶다고 대학에 가서는 공부는 뒷전이고 하루가 멀다 하고 이런저런 모임으로 나다니는 것이 불만이었던 남편의 비위도 맞출 겸 공부만 원 없이 해보기로 작정을 하고 2학기에는 총무직을 사퇴하게 되었다.
그리고 2학기 개학을 하기 전에 어느 날 방송대 대전충남 총학생 회장으로부터 한통의 전화를 받게 된다.
(농학과 재학생이던 이때의 방송대 대전충남 28대 총학생회장은 이날의 인연으로 내가 방송대를 다니는 동안, 그리고 연기학생회장을 하는동안 많은 도움을 주셨고 지금까지도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
이분이 내게 연락한 요건은 -대전충남의 학장님께서 연기군에(지금은 세종시이다.) 연고가 있으신 관계로 연기지역 학생들에게 관심이 많으시며, 연기군 학생회의 발전을 위해 점심 한 끼 사고 싶다고 하시니까 몇 날 몇 시에 어느 곳으로 와달라- 는 내용이었다. 전화를 끊고 학장님께서 특별히 밥 한 끼 사주신다는데 나가야 예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내가 사는 지역의 어느 분들이 동문이신지 궁금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참석하자는 결론을 내렸고 약속한 날짜에 그 장소로 갔다.
30명이 안 되는 연기군 소재의 학우님들이 나와 있었다.
잠시후에는 학장님과 총학생회장, 그리고 총학 임원들 몇 분이 함께 오셨다.
방송대는 모이기만 하면 일일이 자기소개를 한다. 학장님과 총학회장님, 그리고 총학 임원들의 자기소개가 있은 후 연기지역의 학우님들 한 분 한 분도 자기소개를 하였다. 인사를 마치고 화기애애한 식사가 끝날 즈음, 갑자기 총학회장님께서 정색을 하시며 그간의 연기군 학생회에 대한 대략의 내용을 설명하시더니(당시에는 연기군 학생회가 활동이 멈추어 있었다.) 이제라도 다시 연기군 학생회를 활성화할 수 있도록 학생회를 결성해 달라는 것이었다. 부연으로 학장님께서 친히 지원을 아끼지 않을 거라는 이야기도 하였다.
가까운 곳에 학생회가 생겨서 공부에 도움을 받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내심 기뻐하고 있었는데, 마지막 당장 연기군 학생회장을 선출해 달라는 말씀을 하셨고, 그런 후에 학장님이 가실 거라면서 회장 추천을 하라고 하셨다. 같은 지역에 살면서 방송대 대전충남에 적을 두고 있다는 공통점을 가진 것 말고는 다들 처음 보는 분들이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당장 임원 구성을 하라는 것이다.
그래도 난, 그때까지도 아무런 부담이 없었다.
다들 듬직하고 리더십 있어 보이는 분들이 대부분이었기에 난 아닐 거라고 생각하고 편하게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리고 나를 지명한다고 해도 거부하면 된다는 편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딘가 모르게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들어보니 모두들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연기 학우님들은 물론이고 학장님, 총학회장님 모두 나를 보고 계셨다.
나는 반사적으로 '전 아니에요'라고 말하였고, 일하고 있기 때문에 임원 할 시간이 없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총학회장님의 이미 1학년 때 과대표 한 것과 학과 총무를 하다가 지금은 임원직을 모두 그만둔 것으로 안다며 다시 한번 연기군 학생회를 위해서 봉사해 달라고, 부탁이라고 말하였다. 이에 참석했던 학우님들 모두 힘껏 도울 테니 수락해달라고 요청을 하였다.
마음이 무거웠지만 더 이상 거부할 수가 없었다.
반강제로 수락을 하고 난 후 임원 구성을 하여야 했다.
청소년 교육과 남자 학우 한분이 부회장에 수락해 주었고 법학과 여학우님이 총무로 수락해 주었으며 기타 임원들은 추후에 다시 선출하기로 하고 그날의 점심회동은 끝을 맺었다.
높으신 학장님과 총학생회장님의 방문이라 하여 얼굴이나 보자고 나간 곳에서 다시 '학생회장'이라는 부담스러운 짐을 한 짐 지고 돌아오게 되었다. 그리고 집에 와선 소화제를 2알이나 먹었으며 남편에게는 그 모임에 갔다 왔다는 말도 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부터는 남편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나는 방송대 재학 중 졸업 시까지, 5학기 동안 '연기 학생회장'으로 지내었다.
원래 방송대의 전통에 따르면 학회장의 역할은 3학년까지 였다. 4학년은 고문의 자리에서 협조하며 학생회를 후원만 해주고 자신들의 졸업을 위해 시간을 가졌다. 그러나 연기 학생회장을 맡은후 마지막까지 회장직을 맡아 달라는 학우들의 요청(거의 강압)에 의해 후배에게 이양하지 못하고 졸업시까지 유지하게 되었다.
방송대 대전 충남 연기학생회장 : 연기학생회 부활을 알리는 출범식에서 개회를 선언하는중
어쩌면 그래서 더욱 졸업을 위해 노력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3학년 기말고사가 끝나고 차기 회장과 임원 구성을 위한 여러 차례의 회의를 열었지만, 누구는 나처럼 할 자신이 없다는 말로, 그리고 또 누구는 시간이 없다는 말로 수락하지 않는 상황에서 내가 회장직을 벗을 길은 졸업밖에 없어 보였다. 지난 3년보다 더욱 공부에 공을 들였고 그리고 이미 발간된 책이 있어 논문을 쓰지 않아도 졸업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대학을 졸업하면서 논문 한편은 쓰고 싶다는 호기를 부리며 논문 계획서를 제출했다.
아직 회장으로서의 임무도 완수해야 했고, 학점을 펑크 나지 않도록 관리해야 했으며, 계획서대로 논문도 작성해야 하는 여러 가지 부담이 있었지만 졸업하고 말리라는 결심 아래 모두 완수할 수 있었다.
졸업학점을 모두 이수한 후 이임식을 가졌다
그렇게 나는 방송대의 괴물이 되었다.
방송대는 4년제 이면서 4년 만에 졸업하는 비율이 낮아, 4년 만에 졸업하는 학생을 괴물이라고 표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