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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골서재 강현욱 10시간전

고라니. _ 2부.(완결)

단편소설들.


'죄송해요. 깜빡 잠이 들었나봐요.'


 박혜인씨는 당신의 어깨에서 자신을 일으킨다. 머리를 매만지고 코트를 아래로 조금 당겨내리며, 당신을 향해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짓는다. 그녀의 집 앞에 도착해 당신은 아쉬운 마음이 들킬까 황급히 인사하고 다시 택시에 오른다. 길게 숨을 내쉬고 그녀의 뒷 모습을 바라본다. 세상과 선명하게 구분되는 그녀의 경계를 향해 의식과 상관없이 당신은 손을 조금 뻗는다. 그녀의 경계 안을 살펴보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린다. 발끝에서부터 올라오는 뜨거움에 당신은 눈을 질끈 감는다. 당신은 그럴때마다 두려움이 앞선다. 순간 고라니의 인광을 떠올린다. 넘어서고 싶은 것들은 왜 모두 하나같이 아름다운 것인가. 한밤의 살풍경한 도로를 달리다 택시 기사는 전화를 받는다. '오늘은 당신을 닮아 달이 참 예쁘다.' 택시 기사의 통화를 듣다가 당신도 택시를 천천히 따라오는 밝은 달을 올려다본다. 당신은 하얀 달빛을 응시하다 조금 후회도 한다. 차가운 공기로 조금 빨개진 그녀의 콧잔등을 좀 더 오래 바라보지 못했다. 다정한 표정으로  잘 자라며 인사하지 못했다. 이렇게 조금만 더 있어달라고 차마 말하지 못했다. 당신은 다시 황급히 눈을 감는다.

 당신은 아직 자를 때도 되지 않은 머리칼을 자르기 위해 미용실을 찾는다. 박혜인씨와 가까워질수록 잘 보이고 싶은 마음때문이기도 하지만, 사실 반드시 그것 아니다. 누군가가 괜찮다며 당신의 머리를 쓸어주는 기분, 사람손끝이 귓볼을 스칠 때마다 미세하게 오돌토돌해지는 살갗의 느낌, 당신의 얼굴을 다른 사람이 주의깊게 살펴보고 있다는 동질감 비슷한 감정.

그리고 어떤 위로의 언어가 들리는 것처럼 느껴지니까. 당신은 인식조차 하지 못하겠지만, 이혼한 후 당신의 발걸음은 그 전보다 좀 더 자주 미용실을 향한다.


'조금 젊어보이게... 파마를 하면 괜찮을까요? 염색도 좀 해주세요.'


 당신의 머리를 만지고 스치는 미용사의 온기를 가만히 따라간다. 비록 댓가를 주고받는 것이긴 하지만, 가장 중요한 신체의 일부분을 맡겨두었다는 생각에 그녀에게서 모호한 친밀감느낀다. 당신은 눈을 감은 채, 박혜인씨를 떠올린다. 이성을 향한 어떠한 열정도 다시는 느낄 수 없을 거라 여겨온 당신은 촛불처럼 푸르스름하게 타오르는 듯한 열기스스로 놀라기도 한다. 귓바퀴 따라 머리칼이 잘려질 때면, 가녀린 손으로 머리칼을 귀 뒤넘기던 박혜인씨모습을 생각한다. 목에 붙은 까끌한 머리카락의 잔해가 스폰지로 털어질 때면, 당신은 박혜인씨의 동그스름한 목 선을 생각한다. 당신의 머리를 잡고 이리저리 돌려보는 미용사의 눈빛과 거울에서 마주칠 때면, 술에 조금 취해 당신을 올려다보던 박혜인씨의 까만자위를 생각한다. 당신은 부인할지도 모르겠지만, 당신의 일상은 온통 박혜인씨로 가득하다.  순간 당신의 눈꺼풀 안에서 박혜인씨가 살아간다. 마치 고라니의 맨들맨들한 눈동자에 비치는 도시의 불빛처럼. 기어이 가닿고만 싶은 어떤 환희처럼.

 제법 굵은 눈송이를 품고 있을 것만 같은 짙은 구름장이 동녘 하늘을 타고 밀려온다. 여느 때처럼 당신은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그녀부터 살피지만, 오늘 그녀는 부재하다. 있어야 곳에 소중한 존재가 없다는 사실에 실망감과 당혹감은 순간 무거운 족쇄로 변해 당신의 발목 붙잡는다. 그녀의 부재가 심장의 부재로 다가온다. 텅 비어버린 듯한 시간과 의지가지 없는 기분. 당신은 언젠가부터 기다리는 사람이 되었다. 기다리는 동안 당신은 아이스크림을 사러가는 아이가 되지만, 기다림의 끝에서 당신은 행복해지기도, 또 슬퍼지기도 한다. 당신은 조금 망설이다가 용기를 내어 자음과 모음을 하나 하나 결합해 그녀에게 메세지를 보낸다.


'오늘 연가 중이신가 봐요. 몸이 안 좋으신 건가 걱정이 되어서... 별일은 없으시요?'

'엄마가 부정맥 때문에 쓰러지셨어요. 사나흘 후에는 퇴원하실 수 있대요. 걱정해 주셔서 고마워요.'


 '걱정해 주셔서 고마워요.' 박혜인씨가 보낸 문장을 수도없이 보았다가 닫았다가, 다시 들여다본다. 조금 더 가까워진 상상을 하기도 하고, 망상이 되어버려 자존감에 금이 갈까 다시 돌아서기도 하며, 당신은 하루종일 단 한 자도 모니터에 입력하지 못한다. 당신의 시간은 오늘만큼은 48시간으로 늘어났다. 점심은 반을 남겼으며, 매말라가는 입술에 커피를 연이어 축였다. 질책 가득한 과장의 지시를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일몰의 시간에 당신은 몇 번이나 휴대폰을 열었다 닫기를 반복하다, 결국 그녀의 전화번호를 누른다.


'어머니는 좀 어떠신가요. 식사는 하셨나요. 당신은 괜찮나요...'


 아직 이른 시간이라 저녁은 먹지 않았다는 그녀의 말에 당신은 퇴근 후 병원을 찾아간다. 번쩍이는 라이트빛과 날카로운 경적음이 사방에서 흩어진다. 하지만 당신은 오직 그녀와 그녀의 잔상을 뒤따라오는 당신의 두려움떠올린다. 병원을 향하면서도 선택에 대한 모호함이 수시로 당신을 방문한다. 두려움과 모호함을 견디며 가까스로 병원에 도착한 당신은 이내 환해진다. 그녀는 병원 정문 앞에서 차가운 공기와 함께 고요히 서있다. 그녀는 싱긋 웃으며 당신을 맞이한다. 당신의 시야에는 모든 사물이 부옇게 흐려지고 오직 그녀만이 선명하다. 고무줄 하나로 급히 묶은 머리, 화장기 없는 피부에 연한 립밤을 바른 듯한 입술, 눈 아래에 거무스름하게 번진 그늘의 흔적. 조금 초췌해 보이는 그런 그녀가 당신은 아프다. 멀뚱한 고라니처럼 윗니로 아랫입술을 물고서,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본다. 당신은 그녀를 향해 양 팔을 뻗어 그녀의 연약한 날개뼈를 어루만지고 싶다는 충동을 느낀다. 


'추운데 왜 나와 있어요. 어머니는 좀 어떠세요? 배 고프죠?'

'하나도 안 추웠어요. 나, 갑자기 파스타가 먹고 싶어졌어요.'


 그녀는 당신의 팔에 살짝 손을 얹었다 때, 들뜬 아이처럼 말한다. 당신의 심장 근처에서 이름 모를 자그마한 들꽃이 피어나는 것만 같다. 그녀와 함께 근처 레스토랑으로 향한다. 입술에 묻은 크림을 닦으며 파스타를 맛있게 먹는 그녀를 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시작되는지 알 수 없는 비관이 밀려온다. 결국은 싸늘해질 것이라고. 시간은 우리를 쉽게도 속인다고. 숨막히던 그 시절을 아직 온전히 통과하지 못했다고. 당신은 스스로 다짐이라도 하는 것처럼, 손에 쥔 포크에 힘을 가득 준다.


'진수씨는 좋아하는 게 뭐에요? 취미라든지... 그런거?'


 당신은 조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박혜인씨를 바라보다 잠시 생각에 잠긴다. 태어나 처음으로 들어본 질문인 것처럼, 제법 진지하게 고민한다. '내가 좋아하는 게 있었던가.' 그리고 떠올린다. 당신은 지금도 책을 좋아하고, 예전에는 글을 쓰기도 했다. 박혜인씨는 동그래진 눈으로, 당신에게 멋있다는 감탄사를 보낸다. 다 지나간 일이라며 당신은 조금 멋쩍게 웃었지만, 내심 다시 글을 써야겠다고 다짐한다. 정말이지 그녀에게 멋있고 싶으니까. 그리고 문득 살면서 중요한 것 하나는 소중한 사람이 던지는 진지한 질문이라 생각한다. 당신은 질문으로 시작해 어느새 그녀 앞에 앉아 있다. 포크를 쥔 손에서 다시 슬그머니 힘이 빠져나간다.

 그녀와 당신 사이에서 디저트로 나온 커피의 하얀 김이 일어선다. 당신은 그녀와 마주 앉아 지나치게 뜨겁다는 듯, 두 손으로 머그잔을 들어 커피를 한 모금씩 홀짝이며, 수련이 피어난 듯한 그녀를 조심스레 살핀다. '엄마는 이번주 금요일에 퇴원하세요. 혼자 계실 수 있을지 조금 걱정되네요... 제가 너무 무거운 얘기만 했어요.' 울음이 곧 터질 것만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는 박혜인씨의 경계를 본다. 삶이 불시에 던진 질문들로 둘러싸인 박혜인씨의 경계에 선 당신은, 솔직히 무섭다. 격렬하던 마음들도 현실 앞에서 차츰 연약해지고, 무뎌지고, 흐릿해지는 과정을 지켜보다, 결국에는 또 다시 떠나가고야 마는 완고한 등을 아무말 없이 지켜봐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몸이 파르르 떨려온다. 당신은 병원으로 들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숨을 길게 내어쉰다. 늑골 사이의 움품 패인 곳으로 손바닥을 가진런히 올린다. 어느새 먹구름장은 하얀 눈발을 토해내기 시작한다.


 '너, 그리로 가면 안돼. 알잖아. 이미 모두 겪어봤잖아.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렇게 있어. 그래야 살아.'

 당신은 어린 고라니에게 타이르듯 말한다. 하지만 고라니는 파르스름한 빛이 되어 당신에게 가까이 다가온다. 그리고 당신에게 목울음처럼 기괴한 소리로 대답한다.

 '가만히 있어도 죽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건, 죽은 거나 마찬가지니까.'

 단호함이 섞인 슬픈 표정으로 고라니는 허공을 향해 떠오르듯 발을 내밀고, 덩어리진 빛이 되어 추락한다. 가늘어지고 가늘어지다, 결국 점이 되어 사라진다. 고라니를 붙잡으려 당신은 온 힘을 다해 손을 뻗으며 소리친다. '그것 봐... 아무것도 하지 말라니까...' 당신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흩어진다. 눈꼬리를 따라 더운 물이 흐른다. 다리에 힘줄이 모두 끊어진다.


 전기요 위에 머위나무처럼 몸을 외틀어 누은 채, 담요 밖으로 나온 눈꺼풀만이 닫혔다 열리기를 반복한다. 현실에서도 뺨을 지나 배갯잇은 젖어있다. 아직 어둠이 세상을 적시고 있다. 당신은 어둠 너머에서 불안하게 서성이고 있을 고라니를 걱정한다. 고라니는 괜찮을까.

 오늘은 박혜인씨의 어머니가 퇴원하는 날이다. 당신은 오늘 연차를 내었다. 그렇다고 특별히 할 일이 있거나 아픈 것은 아니다. 단지, 박혜인씨가 있는 병원으로 가보고 싶은 마음과 섣불리 선을 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 사이에서 엉거주춤하게 결정한 일이다. 당신은 한참을 망설이다 박혜인씨에게 메세지를 보낸다.


'오늘 퇴원하시죠? 혼자 괜찮겠어요?'

'저녁 6시쯤 퇴원해요. 엄마가 기력이 없으셔서 제가 부축해서 가야할 것 같아요. 그래서 택시타려구요.'

'그럼... 제가 좀 도와드려도 될까요?'


 박혜인씨의 미약한 만류가 있었지만, 당신은 저녁 무렵 퇴원시간에 맞춰 병원을 향해 달려간다. 그녀의 어머니는 멀뚱히 당신을 보다 힘겹게 입술을 움직인다. '왜 이제야 왔어요.' 어머니의 말에 박혜인씨는 미안함이 섞인 표정으로 애써 미소짓는다. '가끔 남자들을 보면 오래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라 생각하세요.' 어머니를 품에 안듯 부축한 당신은 어머니의 연약한 어깨뼈를 느끼며, 조심스레 한 발씩 내딛는다. 박혜인씨와 함께 어머니를 방에 눕히고, 당신은 박혜인씨가 살아가는 공간을 살펴본다. 서가에 꽂힌 수많은 책들에 눈길이 멈춘다. 톨레의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 보르헤스의 단편집들... 당신과 취향이 비슷한 듯한 박혜인씨에게 좀 더 깊은 동질감을 느낀다. 책을 한 권씩 꺼내보다 뒤에서 느껴지는 온화한 기척에 고개를 돌린다. 그녀가 평온한 표정으로 당신을 바라본다. 책을 쥔 손이 축축해지고, 그녀의 머릿결을 쓰다듬싶은 강렬한 열망느낀다. 당신은 그녀와 식탁에 마주앉아 차를 마시며 책에 대한 대화를 나눈다. 그리고 당신의 사양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저녁식사를 준비한다. 대파가 썰리는 소리, 개수대에서 맑은 물이 흐르는 소리, 간을 맞추는 소리, 전기밥솥의 하얀 밥이 익어가는 소리... 집은 단순한 형태가 아닌 수많은 감각들의 집합체라 생각하며, 당신이 살아가는 싸늘한 공간을 떠올린다. 당신은 그녀의 김치찌개가 눈물이 날 만큼 맛있다. 그녀의 경계에는 불안도 묻어있지만, 사람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따뜻한 흔적들 또한 산재해 있다.

'오늘 고마웠어요.' 박혜인씨의 눈빛이 비켜가지 않고 당신의 눈동자에 꽂힌다. 당신은 그 눈빛을 피하지 않는다. 아니, 그 눈빛은 불가항력적이다. 현실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것만 같은 빛에 이끌려 당신은 의지와는 무관하게 그녀에게로 조금 더 다가선다. 그녀는 피하지 않고 당신의 얼굴을 직시한다. 당신은 그녀를 향해 느리게 고개를 숙인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전류가 흐른 것처럼 굳어버린다.

다시 실패할 것이다. 다시 깨뜨려질 것이다. 다시 캄캄해질 것이다.

당신은 다급하게 인사를 하고, 그 자리를 빠져나온다. 시동을 걸고 백미러를 본다. 그곳에는 여전히 그녀가 온 힘을 다해 당신을 건너다보고 있다. 당신은 낯익은 체념 앞에 눈을 감는다.


 박혜인씨는 어머니의 병 간호를 위해 한동안 출근하지 못했다. 당신은 며칠  그녀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 그녀와 당신 사이를 가로지르며 무엇이 흐르는지 알 수 없는 캄캄한 강물 같은 경계. 당신은 발끝을 살짝 담궜지만, 두려움에 가까운 체념에 금세 당신의 발을 오므린다. 그렇다고 당신은 강가를 온전히 떠나지도 못한다. 매혹적이고도 달콤해 보이는 것들은 한편으론,  이리도 위험해 보이는 것인가.

 시간이 흐를수록 당신은 사방이 막힌 쳇바퀴에 올라선 기분이다. 참을 수 없는 답답함에 당신은 그녀에게 결국 전화를 건다. 번의 연결음이 들리고 전화를 받은 그녀는 뜻밖에도 울먹인다.


'엄마가... 엄마를... 잃어버렸어요.'

'... 기 어디에요? 지금 갈게요!'


 당신은 달린다. 울고있는 그녀를 향해 주저없이 달린다. 특별한 사람의 울음은 마음을 찢는 것만 같으니까. 울음이 쉬어갈 수 있도록 곁을 내어주고 싶으니까. 불안한 마음은 흐려지고,  당신의 몸은  행동한다. 눈가에 눈물이 가득 고인 박혜인씨를 마주한다. 박혜인씨가 잠시 밖에 나간 사이 어머니가 사라졌다며, 그녀의 토막난 말이 건너온다. 다급하게 박혜인씨는 저쪽으로, 당신은 이쪽으로 나뉘어 어머니를 찾아 나선. 한참을 헤매이다 당신은 마을 장 어귀에 쪼그리고 앉아있는 박혜인씨의 어머니를 발견한다. 당신은그녀에게 어머니를 찾았음을 알리고, 어머니를 일으킨다.


'이 집으로 같이 가세요.'

'고맙네.'


 집으로 갈 수 있어 고맙다는 말씀인지, 같이 갈 수 있어 고맙다는 말씀인, 당신은 어머니의 말을 곱씹는다. 되뇌이며 세 사람이 나란히 집으로 향하는 모습을 상상한다. 그러다 문득, 어쩌면 사는 일은 그다지 큰 걸 필요로 하는 건 아니라고. 많든, 적든 서로가 허락한 기척과 위안으로 이루어진게 삶인지도 모르겠다고 당신은 생각한다. 박혜인씨의 기척이 달려온다. 당신은 반갑다. 그리고 당신은 스스로가 특별해진 기분이다.


'여기 있어요. 가져올게요.'

'고마워요. 정말.'


 박혜인씨가 어머니를 씻기는 동안, 당신은 자신의 집인 듯 어질러진 물건을 정리하고, 개수대에 쌓인 그릇들을 씻는다. 어머니를 눕히고, 당신과 박혜인씨는 안도하듯 비로소야 고단한 몸을 쇼파에 깊이 넣어 앉는다. 서로를 마주보며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눈다. 다른 팀의 김주임에 대한 이야기, 옆 부서에 근무하는 어느 불친절한 젊은 직원의 이야기, 유명한 TV프로그램에 출연한 어느 남성과 여성의 뒷이야기. 그런 소소한 이야기들. 당신은 이젠 조금  알 것도 같다. 고라니가 왜 가만히 서있는지를. 다가오는 것들이 두려우니까. 하지만 경계를 넘어서고도 싶으니까. 그 사이에서 어떠한 선택도 하지 못해 우두커니 바라보다 소스라치게 놀라 숨어드는 고라니. 당신은 박혜인씨를 가만히 바라보다 그녀의 손에 당신의 포기하지 않은 손을 포갠다. 이윽고 당신의 세상은 낯설어진다.

 경계를 넘은 당신은 또 다시 크고, 작은 결정을 하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어쩌면 견딜 수 없는 임계점의 순간이 다시 찾아와 처절하게 핏물을 흘려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를 바라보며 당신은 생각한다. 삶은 어찌되었흘러가는 거라고. 순간순간 선택하면서. 가끔씩은 커브를 비틀기도 하면서. 그만큼 아프기도 하지만,  또 그만큼 웃기도 하면서.

 오늘투명한 어둠 속에서, 어린 고라니 한 마리가 경계 앞고요히 서있다.


덧. 선택을 하든, 하지 않든 삶은 흘러가겠지요. 용기낸 선택들이 모두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건 아니겠지만, 그저 죽은 물고기처럼 휩쓸려 떠내려가기 보다는 의지를 내어보는건 어떨까 생각해 봅니다. 수많은 용기들을 응원합니다.

작가님들, 그리고 독자님들 항상 강건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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