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라니. 1부.

단편소설.

by 시골서재 강현욱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달빛이 무언가에 취한 것처럼, 희뿌옇게 번져가던 일 년 전의 어느 날, 나는 아내와 헤어질 결심을 했고, 끝내 이혼을 했다.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던 익숙함을 잘라내고, 살던 집에서 나와야 했던 건 나였다. 십 년 이상, 돌탑을 올리듯 공들여 쌓아온 미래였으나, 어긋난 현재의 조각들은, 담보로 잡힌 미래조차 뒤흔드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불안과 후회, 근거 없는 낙관이 섞인 기대를 짊어지고, 나지막한 산 아래에 위치한 낡은 빌라로 이사를 했다. 빌라는 비록 낡았지만, 고즈넉하고 온화했다. 산허리를 넘어 창을 지나 비스듬히 바닥을 가로지르는 햇살이 좋았다. 여름의 짙은 풀 냄새와 흙냄새가 섞여 식탁에 앉아 식은 밥을 먹을 때도 정갈한 밥상을 받는 기분이었다. 거실의 한면은 대학 시절부터 모아온 책들이 차지했는데, 아침 햇살이 서가에 내려앉을 때면, 먼지 입자들이 반짝이며 살포시 피어오르곤 했다. 하지만 넘지 말아야 할 경계를 넘은 것에 대한 형벌처럼, 지나온 시간에 대한 상실감과 남아 있는 세월에 대한 두려움은 나를 끈질기게 괴롭혔다.

거처를 옮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금은 덥게 느껴지던 늦가을의 어느 날이었다. 아침 산책을 하다 도로 옆에 널브러져 있는 고라니 사체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죽은 고라니는 아마도 밤사이 어느 차량과 부딪힌 후 처절하게 몸을 비틀고 배를 밀어 전진하면서, 길 언저리까지 다다른 듯했다. 아스팔트 위로 끌린 검붉은 핏자국이 지난밤의 애처로운 시간을 상상하게 했다. 사람이 다니지 않아 무성하게 자란 잡목 사이에 고라니는 다리를 길게 뻗고서 잠든 것처럼 누워 있었다. 그런 고라니 주변을 노인과 사내들이 집요하게 사냥하듯 에워싸고 있었다. 어떻게 봐도 고라니를 위한 애도의 군집이라 볼 수는 없었다. 조금의 흥분과 또 조금의 즐거움이 묻은 표정들이 그들에게서 어른거렸으니까. 고라니의 초라한 최후에 대한 안타까움이었을까. 기괴한 풍경에 대한 놀라움이었을까. 수신자를 정하지 않은 혼잣말이 입술을 비집고 나와, 씹다가 만 껌처럼 아스팔트 위로 뱉어졌다.

- 고라니들은 위험이 닥치면 왜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는 건지... 도망가면 될 것을...

- 얘네들이 쓸개가 없어서 그런 거요. 쓸개 빠진 사람처럼 아무 생각이 없거든. 험한 거 보고 있지 말고 가던 길이나 가소.

부루퉁한 노인의 말에 뾰족한 감정이 일어났다. 평소라면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도 있었을 테지만, 지난밤을 뜬 눈으로 보낸 탓인지, 바늘이 살갗을 스치는 듯한 감각에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이혼의 후유증인 것일까. 사실 어느 날부터 불면증과 우울증이 그림자처럼 나를 따라다녔다. 작은 소리에도 털이 바짝 일어서듯 예민해지고, 특별한 의도가 없는 말에도 가슴에는 형체가 불분명한 얼룩이 남았다. 규칙적인 아침 산책도 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한 의사의 조언 때문에 갖게 된 나와의 약속 같은 것이었다. 쓸개가 빠진 사람처럼 살아서였을까. 쓸개가 없다는 노인의 말이 나의 흉곽을 세차게 두드리는 것만 같았다.

- 쓸개가 빠졌다니... 무슨 터무니없는 소리를... 고. 라. 니. 쓸. 개.

휴대폰의 검색 창을 열어 고라니 쓸개를 입력했지만, 별다른 지식이나 정보가 나열되지 않았다. 텅 빈 화면에 왠지 모르게 가슴이 저며왔다.

- 정말인가... 정말 쓸개가 없어서 놀란 표정으로 멍하게 있다가, 저렇게 쓸쓸하게 죽는 건가...

나는 한참 동안 휴대폰을 내려다보다 목을 돌려 그들을 바라봤다. 노인과 동네 사내들은 어디선가 해질 대로 해진 마대자루를 구해와 죽은 고라니를 자루 안으로 공들여서 욱여넣었다. 그마저도 죽은 나뭇가지 같은 고라니의 한 쪽 다리가 자루에서 덜렁 흘러내렸다. 네 사람은 핏물이 번지는 마대자루를 일 톤 트럭에 힘겹게 옮겨 실었다. 붉은빛 화색이 가득한 그들의 표정에 왠지 모르게 경멸감이 일어났다. 그러나 일 톤 트럭은 나의 경멸감을 아랑곳하지 않았으며, 무언가를 쟁취한 듯, 요란한 엔진 소리와 함께 그 자리를 유유히 떠나갔다.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고라니의 비루한 관짝에 가슴에 구멍이 뚫리고 바람이 드나드는 것만 같았다. 뒤돌아서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으나, 등산로를 오르면서도 엉겨 붙은 고라니의 잔상은 그림자처럼 뒤를 쫓아왔다. 핏물이 흥건한 고라니에게서 꿈틀거리는 나의 해묵은 상처를 어렴풋이 본 것만 같았으니까.

한 번의 결심으로 많은 걸 잃었다는 생각을 가끔 하기도 하지만, 여전히 나의 몫으로 남겨진 일들을 하며 일상을 흘려보냈다. 아무것도 아닌 일상을 되찾기 위해서 별것 아닌 일들임에도 입술을 악다물곤 했다.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면도를 하고, 타이를 고르며 출근 준비를 서둘렀다. 물론, 아침 식사도 거르지 않고 챙겨 먹는 편이다. 주말에는 드라마를 챙겨 보거나, 때로는 혼자서 목적지 없는 여행을 하기도 하고, 독서량을 좀 더 늘리기도 했다. 갑작스레 쏟아진 자유가 외로움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도록 나만의 방식대로 소소한 일상의 실뜨기를 시도했다. 혼자일 때 느껴지는 외로움보다, 혼자가 아니었을 때 온몸을 휘어 감는 소외감과 자괴감의 무게를 나는 잘 알고 있었으니까. 외로움이 밀려올 때면 정해진 시간에 맞춰서 약을 꺼내 먹듯 아내와 이 년 간의 각방 생활 끝에 이혼을 결심했던 일을 떠올리며 스스로를 타이르곤 했다. 삶의 커브를 급격히 비틀던 그날도 나는 고라니를 만났었다.


유난히도 산안개가 짙은 날의 밤이었다. 농밀한 안개로 인해 희뿌옇게 산란하는 도시의 빛을 받은 산허리는 평소보다 더욱 발버둥 치듯 파르스름하게 타올랐다. 전조등 불빛을 가로막는 반투명한 공기 안에서 가시거리는 짧았다. 4차선 대로에서 커브를 틀어 소로로 진입할 무렵, 고라니 한 마리가 도로 한복판에서 얼음기둥처럼 서 있었다. 나는 단말마의 비명처럼 소리를 내지르며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아야만 했다. 핸들을 움켜잡은 양손은 어느새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길게 숨을 내쉬며 차창 너머에서 우두커니 서 있는 고라니를 빤히 바라봤다. 고라니의 반질반질한 눈동자에 부딪힌 라이트는 기묘한 안광이 되어 나를 향해 되돌아왔다. 선득하기도 한 그 눈빛은 현실을 지워버리는 듯하기도 하고, 또 현실에 눈을 뜨게도 하는 듯한 모호한 빛이었다. 어떻게 보면 나를 향해 질주해서 부딪쳐 올 것도 같고, 각도를 달리해 보면 바들거리며 주저앉은 체념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눈빛. 창밖을 가만히 응시하다 어둠의 깊숙한 곳에서 직선으로 내달리는 듯한 그 빛에 영혼을 빼앗긴 사람처럼 꼼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 비켜... 비키라구... 너... 그러다가 죽어.

산 고양이나 들개들을 몇 번이나 맞닥뜨리기도 했지만, 이런 일은 몇 번을 겪어도 익숙하지 않았다. 언제나 처음 겪는 일인 것처럼 가슴을 쓸어내려야만 했다. 길게 숨을 내쉬고, 짜증을 조금 섞어 라이트를 위아래로 몇 번 깜빡여도 보았지만, 고라니는 갈 곳이 없다는 것처럼, 아니 갈 곳을 모른다는 것처럼, 나를 동공이 사라진 눈으로 응시할 뿐이었다. 피곤함에 화가 치밀어 오르기도 했지만 생각해 보면, 사실 그건 고라니의 잘못은 아니었다. 그들이 살던 곳에 도시를 쌓아 올리고, 백야를 만들어버린 건, 인간이었으니까. 어둠이 눈을 뜰수록 다가가서 만져보고만 싶은 매혹적인 불빛들이 곳곳에서 치솟아 올랐으니까. 경계는 단번에 뛰어넘을 수 있을 것만 같은 좁은 2차선 도로였을 뿐이니까. 아직 어려 보이는 고라니는 시체처럼 굳어버린 듯했으나, 다시 푸르스름한 산을 향해 뛰어 올라갔다. 안도감이 섞인 불가해한 허전함 때문에 잡목들의 흔들림을 쫓아 고라니의 윤곽을 가만히 추적했다.

- 주의. 고라니, 멧돼지 출몰 지역.

한쪽 귀퉁이가 찢어진 현수막이 칼바람을 맞으며 둔탁하게 울부짖었다. 고라니든, 멧돼지든, 그들에게 산은 분명 익숙하고 편한 공간일 것이다. 그들은 매혹적인 불빛을 향해 넘어서거나, 골짜기로 되돌아가거나, 아니면 그 자리에서 머뭇거리다가 죽어야만 했을 것이다. 어떤 선택을 하든 그 결과를 알 수는 없었지만, 그들은 선택하고, 또 선택해야만 했다. 고라니는 왜 사람을 보면 얼어붙은 듯 서 있다가 다시 산으로 뛰어올라 가는 걸까. 후회일까. 체념일까. 공포일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생각에 잠기다, 동일한 동선을 매일 그리며 지박령처럼 살아가는 나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에 자조적인 웃음이 흘러나왔다. 엑셀을 밟은 다리에 다시 힘을 주었으나, 발바닥에 구멍이라도 뚫린 건지, 낡은 아반떼는 느리게 움직였다.

고개를 뒤로 젖히고 불이 켜진 집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며 습관처럼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파트 꼭대기 층에 걸린 달이 나의 품으로 곧 뛰어내릴 준비라도 하는 것처럼 세상은 적막했다. 조금 전까지 걸어온 길이 아쉽기라도 한 듯 뒤돌아보았지만, 지나온 길을 어둠이 까맣게 지운 것만 같았다. 축 처진 어깨를 하고서 계단을 올라 공동 현관문의 비밀번호를 눌렀다. 숫자를 누를 때마다 밝혀지는 연푸른빛과 함께 오늘 마주친 고라니의 형형한 눈빛이 눈꺼풀 안에서 명멸했다. 마치 최면에라도 걸린 듯, 푸르스름한 빛의 움직임을 따라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집에 들어설 때마다 느껴지는 싸늘함이 오늘은 유난히도 깨진 유리 조각이 되어 날카롭게 외피를 긁었다.

- 늦었네. 신발 벗기 전에 쓰레기 좀 버리고 와. 현관 입구에 내어놓았어. 재활용이 분리가 안 됐을 거야. 가서 분리해서 좀 버리고.

아내와 열네 살 된 딸아이는 나란히 소파에 앉아 드라마를 시청 중이었다. TV 소음과 뒤섞인 아내의 목소리는 자동 재생되는 어떤 기계음처럼 조금의 물기도 없이 건조했다. 오늘 아내와 나눈 첫 대화였다. 아내의 말과 나 사이에 어떤 척력이라도 작용하는 것처럼, 나는 신발을 벗다가 말고 다시 신발 안으로 발을 집어넣었다. 날카롭고 뜨거운 것이 목울대에 걸린 것처럼 느껴져 입을 막고 옅은 기침을 두어 번 내뱉었다. 구깃한 정장 차림으로 한 손에는 재활용 쓰레기를, 다른 한 손에는 일반쓰레기를 들고서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 나갔다. 눌러 담은 쓰레기의 무게가 육중한 닻이 된 것처럼, 복도 바닥을 향해 침잠하는 것만 같았다. 봉투에 아무렇게나 담긴 플라스틱과 유리병, 음료 캔과 종잇조각을 바닥에 내려두고 어설픈 모양새로 무릎을 굽혀 앉아 분리했다. 그곳에는 여과되지 않은 감정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피로, 환멸, 슬픔, 후회... 분리하고 남은 건, 허무와 무감함이었다. 나는 왜 이렇게 되었을까. 금이 간 항아리에 물이 새듯, 자존감은 내 안에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결국 언젠가는 완전히 깨져버릴지도.

쓰레기를 버리고 돌아와 옷을 갈아입고, 아직 채 열기가 가시지 않은 국을 떠서 밥을 말아 먹었다. 거실 TV에서 흘러나오는 알아들을 수 없는 잡음들. 아내와 딸의 동시다발적인 웃음과 감탄사만이 거실을 채웠다. 매캐한 연기처럼 자욱한 소리 안에서 나의 존재가 흐릿해지고 있음을 느꼈다. 드라마가 끝나자, 딸아이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고, 학원에서 내어준 숙제를 하는 듯했다. 아내는 침실로 들어가고, 여느 때처럼 유튜브를 시청하는 듯했다. 나는 서재로 들어가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리나를 펼친 후, 어제 다 읽지 못한 부분을 읽기 시작했다. 각자의 방으로 일제히 흩어지고, 나의 하루 중 가장 평온한 시간에 전원이 들어왔다. 회사에서도, 일터에서도, 그다지 존중받지 못했기에, 평온이 허락된 이 시간만큼은 필사적으로 지켜내고자 노력했다. 잠시나마 책을 펼친 내가 특별해진 것만 같은 기분이 들곤 했으니까. 하지만 그날은 한순간에 두꺼비 집이 내려간 듯, 그마저도 오래가지 못했다. 서재의 문이 날카롭게 열리고 어떤 애정도 느껴지지 않는 아내의 말이 얼음송곳처럼 날아들어 아무것도 없던 감정의 곳곳에 생채기를 내었다. 톨스토이의 말처럼,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이유가 제각기 달랐던 것이다. 치약때문이었다.

- 아래에서부터 치약 짜 쓰라고 몇 번을 말해! 왜 사람이 말을 하면 들어주질 않아. 그리고 나, 내일 출장이야. 이틀 걸려.

- 지난주에도 갔었잖아. 무슨 출장이 그렇게 잦아.

- 회사 일이 그런 걸 어떻게 해. 민서 밥 잘 챙겨 먹이구.

한순간 부러진 면도날 같은 침묵이 일어났고, 침묵을 견디지 못한 문은 부서질 듯 닫히고야 말았다. 분노와 경멸감, 의구심이 혼재된 감정은 아내가 단호하게 닫은 견고한 문틈에 끼어 방 안을 서성였다. 나는 서재에 이불을 펴고, 형광등을 끄고서 자리에 누웠다. 아내와 따로 자기 시작한 일이 어느덧 이 년이 되었다. 처음 각방을 시작했던 그 어느 날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나비의 날갯짓처럼 사소했던 나의 코골이로 인한 선택의 순간. 선택은 언제나 예상치 못한 결과를 동반했다. 나의 코골이로 인해 수면 부족에 시달리던 아내를 생각해, 한 치의 의심도 없이 결정한 일이었다. 이후로 꾸준히 치료받았고 코골이는 점차 사라졌지만, 아내와 나 사이에 알게 모르게 자라난 벽은 그만큼 반비례해서 두터워졌다. 코골이와는 상관없이 아내와 나는 언젠가부터 분리된 각자의 생활에 편안함과 만족감을 느꼈다. 얼마 간은 가끔 동침을 하기도 했지만, 그것조차 아내나, 나에게 의무감이 섞인 불편함이 되어 다가왔다. 어지러운 입자들이 팽팽하게 당겨진 천장을 바라보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당겨 덮었다. 캄캄한 이불 안에서 얼어붙은 고라니의 눈빛이 발끝에서부터 스멀스멀 기어 오르는 듯했다. 고라니의 영롱한 눈빛이 뇌관이 되어 명치 깊숙한 곳에서 불꽃을 일으키는 것만 같았다.

- 가만히 있으면 죽는 것조차 모르면서 죽어.

벽을 향해 둥글게 몸을 말고서 팔을 베고 누웠다. 수많은 감정과 생각이 밀려오고 쓸려가면서 눈꺼풀을 흔들었다. 이상하리만큼 참을 수 없는 한기가 이불 안에서부터 차오르고 있음을 느꼈다. 그저 환대받지 못한 채, 쓰레기를 버렸을 뿐이고, 아내의 역정을 들었을 뿐이다. 달이 파르스름하게 일렁였을 뿐이고, 고라니와 눈을 마주쳤을 뿐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의연하게 나 자신을 달래보려 애를 써보지만, 끝내 이해되지 못해 넘치는 차가움은 더욱 깊은 심연 안에서 나를 동결시키는 것만 같았다.

- 나는 행복한가. 참을 수 없는 임계점에 도달했는가. 나의 미래는 스스로가 설득시켜 온, 그저 막연한 희망뿐인가.

발가벗겨진 근원적인 질문들이 쏟아졌으나, 그 질문에 차마 답을 할 수 없었다. 악물린 입술 사이로 피멍이 차츰 번져갔다. 무엇하나 확신할 수 있는 것도 없었지만, 바싹 마른 입술로 마침내 결심했다. 이불 밖으로 뛰쳐나와 단호하게 문을 열어젖히고 무서운 불확실성이 덧대어진 경계를 향해 다가갔다. 고라니처럼 죽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하다가 죽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그렇게 몇 번의 분란을 지나 결국 불투명한 경계를 넘었다. 하지만 나는 그것에 대한 어떠한 변호를 하고 싶거나, 증명하고 싶은 적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저 다른 사람들처럼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지금껏 일상을 살아온 것뿐이다. 어슴푸레한 외로움과 차분한 건조함과 조금의 두려움을 가까이에 두고서.

여느 때처럼 가다서다를 반복하다 겨우 출근 시간에 맞춰 사무실에 들어섰다. 후천적으로 새겨진 염색체가 활성화라도 된 것처럼 옆 팀에서 근무 중인 박혜인씨부터 힐끗 살폈다. 그녀는 언제나 그렇듯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모니터를 진중한 표정으로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녀를 볼 때면 하얀 백합이 떠오르곤 했는데, 아무리 봐도 그 모습은 질리지가 않았다. 그녀가 우리 부서로 전보되었던 첫날을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한다. 단아하게 말아 올린 숱 많은 까만 머리칼, 하얀 피부에 얹힌 옅은 쌍꺼풀, 단정한 아이보리 색 블라우스와 주름 잡힌 검정 치마. 그날 이후 나는 세상과 선명하게 구분되어지는 그녀의 경계를 보일 듯 말 듯 기웃거렸다. 그녀는 항상 희미한 슬픔이 묻은 표정이었지만 언제나 다정하게 웃었고, 가느다란 입술에서는 언제나 준비가 된 듯한 부드러운 언어들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까만 우물 같은 그녀의 동공과 닿을 때면 나는 어쩔 줄 몰라 눈동자를 여기저기로 옮겨다니곤 했다. 그녀는 내가 아파 보이기라도 하는 날이면 비타민이나 두통약을 챙겨주기도 했고, 내가 마시다가 남긴 커피를 자신의 잔에 아무렇지 않게 따르기도 했다. 그럴 때면 선의와 유혹 사이에서 밀려오는 어떤 생경한 마음이 밀려와 조금 두려워 지기도 했다. 하지만 오래전에 가져본 적도 있는 듯한 두려움이 왠지 싫지 않았다. 그것은 기억조차 없을 만큼 풍화되어 버리고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은 낯선 감정이었으나, 어느 날 우연히 발굴된 설렘에 가까운 기분이었으니까.

- 김주임. 계획서가 이게 뭐야. 작년이랑 토시 하나 안 틀리고 똑같잖아. 생각 좀 하며 일해.

- 죄송합니다.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 열심히 하지 말고, 좀 잘해라. 승진 안 할 거야? 아무 생각 없이 매일 똑같이 사니까 그런 거야. 쯧...

오늘 하루 동안, 아니 오랫동안 나의 이름이 거론될 때면, 사람들은 탕비실에서, 흡연실에서, 또는 등나무 시렁 아래 벤치에 앉아 모욕적인 이 순간을, 순간이 아닌 듯 길게 이야기할 것이다. 인간에 대한 오랜 경험상 그런 느낌은 모호하지만, 실체를 가진 것이었고,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나의 영혼을 짓누르곤 했다. 타인의 시선으로 누더기처럼 도배된 지나온 삶에서 사실 얻은 것도, 발견한 것도 없었다. 선배와 후배 사이에서 눈치를 살피는 일이 본능이 되었고, 동기들의 자랑 섞인 푸념에 어색한 위로를 전하는 예의가 가끔 비루하게 느껴지곤 했다. 그들은 모두 삶의 목표가 있는 듯했지만, 거울 속의 나는 아주 오랫동안 텅 빈 얼굴이었다. 직장인인 아내를 만나 풍족한 삶을 꿈꿀 수 있었으나, 사랑이 없었기에 공허할 뿐인 일상은, 어느새 꿈도 존재도 남김없이 빨아들이는 블랙홀과도 같았다. 하지만 그런 나도 분명, 한때는 꿈이 있었다. 단지 블랙홀 같은 일상이 모든 것을 캄캄하게 지웠을 뿐이었다. 먹고 사는 게 바쁘다는 말로 스스로를 위장하는 일이 훨씬 쉬웠으니까.

나는 소설을 쓰는 작가가 되길 희망했기에 문예창작학과에 입학했고 졸업했다. 그리고 작은 출판사에 취업해 작가들을 동경 섞인 표정으로 인터뷰하고, 그들이 쓴 글을 정성스레 교정하며 조금씩 나만의 소설을 쓰기도 했다. 비록 수입은 적었지만, 흘러가는 삶 앞에 당당할 수 있었다. 하지만 출판사 사정이 어려워지고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위태롭게 비틀거리다가 결국 현실을 향해 무게추를 기울여야만 했다. 합리적인 선택이었다고 나 자신을 설득하는 일에 얼마간의 시간을 할애해야만 했다. 하지만 선택에 대해 단 한 번도 후회해 본 적은 없었다. 안정적인 보수가 지급되는 공무원이 되었고, 주관이 뚜렷한 합리적인 아내를 만났으며, 딸아이의 신비로운 탄생도 경험할 수 있었으니까. 꿈, 영원, 사랑. 이런 말들에 흥분하지 않는, 그저 사십 대의 중년이 된 것뿐이니까. 하지만 양보한 시간, 그 이상의 공허함이 사채빚이 되어 수없는 독촉장을 고지해 왔다. 어깨는 움츠러들고, 허리는 꺾였으며, 시선은 항상 발끝을 보며 걸었다. 딸아이를 통해 삶의 의미를 되찾으려 애쓰기도 했지만, 딸아이는 나와는 다른 별개의 존재이자, 삶이었다.

과장의 질책에 눌려 주눅든 나는 자리로 돌아와 모니터를 켜고, 계획서를 수정했다. 딱히 잘못된 것처럼 보이지 않는 계획서를 이리저리 다시 살펴볼 무렵, 어깨에 부드럽게 손을 얹는 듯한 박혜인씨의 메세지가 날아들었다.

-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세요. 과장님은 모든 사람에게 말을 막 하시잖아요... 점심 같이 드실래요? 제가 살게요.

그녀가 가끔 보내오는 다정한 문장은 기죽은 나에게 놀랄만한 용기를 불러일으키곤 했다. 마치 캄캄한 동굴 안에서 가늘게 일렁이는 따듯한 빛줄기를 보는 것만 같았다. 그곳에 무엇이 있든 이끌리듯 따라가 만져보고만 싶은 빛. 자꾸만 마음에 걸려 한 번 더 돌아보게 되는 빛. 걸려서 넘어질지도 모를 그 빛을 향해 두렵지만 조심스레 다가갔다. 마치 주춤주춤 전진하는 고라니의 발걸음처럼.

- 저... 괜찮으시면, 점심 대신 마치고 맥주 한 잔, 할 수 있을까요? 제가 살게요.

- 네. 그래요.

그녀의 위로를 가만히 내려다보다 무엇에 홀린 것처럼 그녀를 향해 조금 더 발을 내밀었고, 그녀는 거리낌 없이 허락했다. 용기라 하기에는 대단할 것도 없는 부탁이었지만, 받아들여진 마음은 형용할 수 없는 기쁨을 생산했다. 덕분에 과장으로 인한 불쾌한 기억은, 고마운 순간으로 치환될 수 있었다.

- 괜찮아?

- 뭐가...? 아... 나 아무렇지도 않은데.

복도에서 마주친 동료들의 뜻 모를 질문에 어처구니없는 웃음만이 나왔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고,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좋았다. 하지만 그들은 타인의 불행은 없다 하더라도 있어야만 한다는 표정으로 다시 한번 힘내라는 말을 하고서 종종걸음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나는 그 무엇도 들리지도,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았다. 단지 수시로 시계를 살폈고 창밖을 바라보며 과장이 말한 계획서를 조금은 즐겁게 수정할 뿐이었다. 창백한 햇살이 마지막으로 창가를 지나갈 무렵, 아무것도 없는 밤이 이토록이나 기다려질 수 있다는 사실에 조금 어리둥절해 하기도 했다.


덧. 찬란한 봄입니다. 살구꽃이 어느새 예쁘게도 피었습니다. 중력을 거늘러 피어나는 꽃들처럼, 일어서서 당당하게 걸으시는 계절이길 바라봅니다.

작가님들. 독자님들 항상 강건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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