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라니. 2부.

단편소설.

by 시골서재 강현욱


나는 퇴근 전 화장실 거울 앞에서 한참을 서성였다. 오랜만에 바라보는 내가 생경했다. 어떤 다짐처럼 머리를 매만지고, 스킨을 조금 더 발랐다. 시계를 보며 초조함과 설렘을 쫓아 건물을 빠져나왔다. 그녀는 퇴근하는 사람들 사이에 서 있었는데, 그녀 외엔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오직 그녀만이 보였다. 구청 앞 횡단보도에서 그녀를 만나 과장에 대한 농담 섞인 험담을 하며 인근 맥주집으로 향했다. 그녀와 나름 친하다고 여겨왔지만, 그녀와 단둘이 밖에서 만나는 일은 처음이었기에 심장은 평소와 달리 격렬하게 요동쳤다. 구릿빛 생맥주 몇 잔이 부딪치고, 취기 어린 입술은 더듬더듬 소리를 만들었다.

- 혜인씨는 예뻐요. 웃는 모습도, 일하는 모습도... 그런데 혜인씨에게는... 음... 알 수 없는 그늘 같은 게 느껴져요.

- 그런가요... 엄마가 치매를 앓고 계셔서... 숨기려고 애쓰지만, 저도 모르게 조금씩 드러났었나 봐요.

박혜인씨는 결혼하지 않은 사십 대 초반의 여성이었다. 단아한 외모와 다정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결혼을 하지 않았다. 5년 전, 그녀 또한 정혼자가 있었지만, 그 무렵 그녀의 어머니는 부정맥으로 쓰러지고, 후유증처럼 치매가 뒤따랐다. 그녀의 어머니는 완전히 다른 사람인 것처럼 행동하기도 했고,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는 순간도 많아졌다. 가끔은 가본 적도 없는 곳에서 헤매다 파출소로부터 연락을 받고 그녀가 달려가기도 했다. 그녀는 자신의 일상으로 누군가를 데려오는 일이 두려웠기에 결국 노모와 둘만의 삶을 선택했다. 어쩔 수 없던 선택의 순간을 겪어야만 했던 그녀를 향해 짙은 연민의 감정이 일었다. 그녀에 대해 조금은 더 많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스스로가 특별해진 것만 같은 기분이 되었고, 착각인지도 모를 친밀함으로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 택시 뒷좌석에 몸을 구겨 넣어 나란히 앉았다. 조금 어색한 기분에 창밖만 바라보고 있을 무렵, 택시 안의 조금 더운 공기와 고단함 때문인지 그녀는 해바라기처럼 목이 몇 번이나 기울어졌다. 나는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그녀를 향해 나의 어깨를 조금씩 가까이 가져갔다. 그녀의 잔꽃무늬 플레어 치마의 감촉이 나의 손끝에 가만히 닿았다. 부드럽고도 간지러운 느낌에 손가락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내 나의 어깨 위로 그녀의 오드콜로뉴 향이 깃털 같은 무게로 떨어졌다. 나의 심장이 뛰는 소리가 몸 밖으로 터져 나오면 낚아채어 숨기기라도 할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저 창밖을 바라보다 다시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리길 반복할 뿐이었다.

- 죄송해요. 깜빡 잠이 들었나 봐요.

- 아니에요. 무게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어요. 꼭 영혼이 기댄 것처럼.

박혜인씨는 당황한 표정으로 나의 어깨에서 자신을 일으켰다. 머리를 매만지고 코트를 아래로 조금 더 당겨 내리며, 나를 향해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었다. 택시는 원망스러울 만큼 밤거리를 빠르게 질주했다. 그녀의 집 앞에 도착해 황급히 그녀에게 인사하고 다시 택시에 올랐다. 아쉽고 서운한 마음이 들킬까, 그녀의 눈을 바로 볼 수 없었다. 택시의 뒷유리창으로 고개를 돌려 그녀가 사라질 때까지 시선을 떼지 못했다. 세상과 선명하게 구분되는 그녀의 경계를 향해 후천적으로 생겨난 본능처럼, 손을 조금 뻗었다. 그녀의 경계 안을 살펴보고 싶은 욕망이 내 안에서 꿈틀거리며 아우성을 지르는 듯했다. 발끝에서부터 올라오는 뜨거움에 깜짝 놀라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순간 고라니의 안광이 떠오르며,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앞섰다. 넘어서고만 싶은 것들은 왜 하나같이 모두 아름다운 것인가. 그 너머에는 기대와 일치하는 그 무엇이 있을까. 고개를 가로로 두어 번 저을 무렵, 한밤의 살풍경한 도로를 달리던 택시 기사가 전화를 들어 통화를 했다.

- 오늘 달이 당신을 닮아 참 예쁘다.

택시 기사의 통화를 엿듣다가 택시를 천천히 따라오는 밝은 달을 올려다보았다. 그녀를 닮은 듯한 달이 아름다웠다. 하얀 달빛을 응시하다 문득 후회가 들기도 했다. 차가운 공기로 조금 빨개진 그녀의 콧잔등을 좀 더 오래 바라보지 못했으니까. 다정한 표정으로 잘 자라며 인사하지 못했으니까. 이렇게 조금만 더 있어 달라고 차마 말하지 못했으니까. 달빛이 저리도 환하건만, 다시 황급히 눈을 감았다.

아직 자를 때도 되지 않은 머리칼을 자르기 위해 근처 미용실을 찾았다. 박혜인씨와 가까워질수록 잘 보이고 싶은 마음 때문이기도 했지만, 사실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누군가가 괜찮다고 토닥이며 머리를 쓸어주는 듯한 기분, 사람의 손끝이 귓볼을 스칠 때마다 미세하게 오돌토돌해지는 살갗의 느낌, 나의 얼굴을 다른 누군가가 주의 깊게 살펴보고 있다는 동질감 비슷한 감정. 그리고 유심히 들여다보다 이어지는 다정한 말들.

- 조금 젊어 보이게, 파마를 하시면 어떨까요? 염색도 하시면 더 젊어 보이실 것같아요.

나의 머리를 만지고 스치는 미용사의 온기를 가만히 따라갔다. 비록 대가를 주고받는 것이긴 했지만, 가장 중요한 신체의 일부분을 맡겨두었다는 생각에 그녀에게서 알게 모르게 친밀감을 느꼈다. 눈을 감았으나, 눈꺼풀 안에서 박혜인씨가 보였다. 이성을 향한 어떠한 열정도 다시는 느낄 수 없을 거라 여겨왔기에 아래에서부터 촛불처럼 불그스름하게 타오르는 듯한 열기는 나를 조금 당황하게도 했다. 귓바퀴를 따라 머리칼이 잘려질 때면, 가녀린 손으로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던 그녀의 모습을 생각했다. 목에 붙은 까끌한 머리카락의 잔해가 스펀지로 털어질 때면, 그녀의 동그스름한 목선을 머릿속에 따라 그렸다. 거울을 사이에 두고 나의 머리를 잡고 이리저리 돌려보는 미용사의 시선과 우연히 마주칠 때면, 조금 술에 취해 나를 올려다보던 그녀의 까만 자위가 거울 속에 비쳤다. 언젠가부터 나의 일상은 그녀로 채워지고 있었다. 매 순간 나의 눈꺼풀 안에서 그녀가 살아가는 것만 같았다. 마치 고라니의 맨들맨들한 눈동자에 비치는 도시의 불빛처럼. 기어이 가닿고만 싶은 어떤 환희처럼. 고개를 돌릴 수 없는 어떤 매혹처럼.

제법 굵은 눈송이를 품고 있을 것만 같은 짙은 구름장이 동녘 하늘을 따라 밀려왔다. 여느 때처럼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박혜인씨부터 살폈지만, 오늘의 그녀는 부재했다. 있어야 할 곳에 소중한 존재가 없다는 사실에 실망감과 당혹감은 한순간 무거운 족쇄로 변해 발목을 붙잡는 것만 같았다. 텅 비어버린 듯한 마음과 의지가지없는 듯한 기분. 나는 언젠가부터 기다리는 사람이 되었다. 기다리는 동안 아이스크림을 사러 가는 아이가 되지만, 기다림의 끝에서 행복해지기도, 또 슬퍼지기도 했다. 오늘은 아이스크림을 사 들고 돌아오다 아이스크림을 떨어뜨린 아이가 되었다. 조금 망설이다가 용기를 내어 자음과 모음을 신중하게 결합해 그녀에게 더듬더듬 안부를 물었다.

- 오늘 연가 중이신가 봐요. 몸이 안 좋으신 건가 걱정이 되어서... 별 일은 없으시지요?

- 엄마가 부정맥 때문에 다시 쓰러지셨어요. 사나흘 후에는 퇴원하실 수 있대요. 걱정해 주셔서 고마워요.

그녀가 보낸 문장을 수도 없이 보았다가 닫았다가, 다시 들여다보았다. 조금 더 가까워진 상상을 하기도 하고, 망상이 되어버려 자존감에 금이 갈까 다시 돌아서기도 하며, 하루 종일 단 한 자도 모니터에 입력하지 못했다. 오늘만큼은 시간이 사십 팔시간으로 늘어난 것만 같았다. 점심은 반을 남겼으며, 메말라 가는 입술에는 커피를 연이어 축여야만 했다. 질책 가득한 과장의 지시는 전혀 들리지도, 기억하지도 못했다. 일몰의 시간에 몇 번이나 액정을 들여다 보기를 반복하다, 결국 저장된 그녀의 전화번호를 힘주어 눌렀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짧은 신호음이 야속하기만 했다.

- 어머니는 좀 어떠신가요. 식사는 하셨나요. 당신은 괜찮나요.

아직 이른 시간이라 저녁은 먹지 않았다는 그녀의 말에 퇴근하자마자 병원을 향했다. 번쩍이는 라이트와 날카로운 경적음이 사방에서 쏟아졌지만, 오직 그녀에 대한 걱정과 그녀의 뒤를 따라오는 두려움만이 느껴졌다.

- 이렇게 찾아가도 괜찮을까. 그녀가 부담스러워 할까. 아니, 나는 자신이 있는가.

병원을 향하면서도 선택에 대한 모호함이 수시로 내 안을 다녀갔다. 두려움과 모호함을 견디며 가까스로 병원에 도착한 나는 그녀를 보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의식과는 상관없이 환해졌다. 그녀가 병원 정문 앞에서 차가운 공기와 함께 고요히 서 있었다. 그녀의 향기에 취한 것처럼 몸은 반응하듯 따라갔다. 그녀는 싱긋 웃으며 나를 맞이했다. 나의 시야에는 모든 사물이 부옇게 흐려지고 오직 그녀만이 남았다. 고무줄 하나로 급히 묶은 머리, 화장기 없는 피부에 연한 립밤을 바른 듯한 입술, 눈 아래에 거무스름하게 번진 그늘의 흔적. 조금 초췌해 보이는 그녀가 아프게 다가왔다. 멀뚱한 고라니처럼 윗니로 아랫입술을 물고서,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그녀를 가만히 바라봤다. 그녀를 향해 양팔을 뻗어 그녀의 연약한 날개뼈를 어루만지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 추운데 왜 나와 있어요. 어머니는 좀 어떠세요? 배고프죠?

- 하나도 안 추웠어요. 나, 갑자기 파스타가 먹고 싶어졌어요.

그녀는 나의 팔에 살짝 손을 얹었다 떼며, 들뜬 아이처럼 말했다. 심장충격기의 전류가 흐르면서 생명을 불어넣는 것처럼, 심장 근처에서 이름 모를 자그마한 들꽃이 피어나는 것만 같았다. 입술에 묻은 크림을 닦으며 파스타를 맛있게 먹는 그녀를 지그시 바라봤다. 그런데 어디선가 본 것만 같은 장면어었다. 어디서부터 시작되는지 알 수 없는 막연한 비관이 먼지처럼 나지막이 번져갔다. 결국은 싸늘해질 것이라고. 시간은 우리를 쉽게도 속인다고. 숨 막히던 그 시절을 아직 온전히 통과하지 못했다고. 나의 손은 다짐이라도 하는 것처럼, 쥐고 있던 포크에 힘을 가득 주었다.

- 진수씨는 좋아하는 게 있나요? 취미라든지... 그런거?

조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태어나 처음으로 들어본 질문인 것처럼, 제법 진지하게 고민했다.

- 내가 좋아하는 게 있었던가... 아... 저는 지금도 독서를 좋아하고, 예전에는 글을 쓰기도 했었어요.

그녀는 동그래진 눈으로, 멋있다는 감탄사를 연사했다. 다 지나간 일이라며 조금 멋쩍게 웃긴 했지만, 연사된 폭죽이 싫지 않았고, 내심 다시 글을 써야겠다고 막연한 결심을 했다. 정말이지 그녀에게 멋있고 싶었으니까. 그리고 문득 살면서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소중한 사람이 던지는 진지한 질문이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그녀를 향한 질문으로 시작해 어느새 그녀 앞에 이렇게 앉아 있었다. 질문은 나와 내 삶에 대해 의미를 발견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포크를 쥔 손에서 다시 슬그머니 힘이 빠져나갔다.

나와 그녀 사이에서 디저트로 나온 커피의 하얀 김이 일어서다 흩어지고, 다시 일어섰다. 그녀와 마주 앉아 지나치게 뜨겁다는 듯, 두 손으로 머그잔을 들어 커피를 한 모금씩 홀짝였다. 가늘게 기울어진 눈매를 하고서 수련이 피어난 듯한 그녀를 살폈다.

- 엄마는 이번 주 금요일에 퇴원하세요. 혼자 계실 수 있을지 조금 걱정되네요... 제가 너무 무거운 모습만 보여드린 것 같아요.

울음이 곧 터질 것만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는 박혜인씨의 경계를 더듬었다. 삶이 불시에 던진 질문들로 둘러싸인 타인의 경계는, 솔직히 무서웠다. 격렬하게 일렁이던 마음들도 현실 앞에서 차츰 연약해지고, 무뎌지고, 흐릿해지는 과정을 다시 무기력하게 지켜봐야 할지도 모르니까. 그리고 결국에는 또다시 떠나가고야 마는 완고한 등을 아무 말 없이 지켜봐야 할지도 모르니까. 오한이 휘어 감은 듯 나의 몸은 파르르 떨려왔다. 병원으로 들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숨을 길게 내어 쉬었다. 호흡을 따라 미세한 통증이 느껴졌다. 늑골 사이의 움푹 파인 곳으로 손바닥을 가만히 올렸다. 먹구름장은 기어이 굵은 눈발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되돌아 가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 너, 그리로 가면 안 돼. 알잖아. 이미 모두 겪어봤잖아.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렇게 있어. 그래야 살아.

나는 어물쩡거리는 고라니에게 다그치듯 말했다. 하지만 고라니는 파르스름한 빛이 되어 물이 흐르듯 나를 향해 다가왔다. 고라니는 목울음을 섞어 기괴한 소리로 대답했다.

- 가만히 있어도 죽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건, 죽은 거나 마찬가지니까.

슬펐으나 또렸한 표정으로 고라니는 하늘을 향해 떠오르듯 발을 내밀었고, 덩어리진 빛이 되어 이내 추락했다. 가늘어지고 가늘어지다, 결국 점이 되어 소멸했다. 고라니를 붙잡으려 나는 온 힘을 다해 손을 뻗으며 소리를 내질렀다.

- 그것 봐... 그것 보라구. 아무것도 하지 말라니까...

나의 목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허공에서 흩어졌다. 눈꼬리를 따라 더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다리의 힘줄이 모두 끊어진 것처럼 털썩 주저앉았다.

악몽이었다. 머위 나무처럼 몸을 외틀어 누운 채, 담요 밖으로 나온 눈꺼풀만이 닫혔다 열리기를 반복했다. 현실에서도 눈물길은 뺨을 지나 베갯잇까지 이어져 있었다. 여전히 창밖은 어둠이 세상을 적시고 있었다. 나는 어둠 너머에서 불안하게 서성이고 있을 고라니가 문득 걱정되었다. 고라니는, 과연 괜찮을까.

오늘은 박혜인씨의 어머니가 퇴원하는 날이었다. 나는 연차를 내었다. 그렇다고 나에게 특별히 할 일이 있거나, 아픈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녀가 있는 병원으로 가보고 싶은 마음과 섣불리 선을 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 사이에서 우물쭈물하며 결정한 일이었다. 한참을 망설이다, 그녀에게 메세지를 보냈다.

- 오늘 어머님 퇴원하시죠? 혼자 괜찮겠어요?

- 저녁 6시쯤 퇴원해요. 엄마가 기력이 없으셔서 제가 부축해서 가야할 것 같아요.

- 그럼... 제가 좀 도와드려도 될까요?

그녀의 미약한 만류가 있었지만, 나는 저녁 무렵 퇴원 시간에 맞춰 병원을 향해 달려갔다. 그녀의 어머니는 멀뚱히 나를 쏘아보다 힘겹게 입술을 움직였다.

- 왜 이제야 왔어요.

어머니의 말에 그녀는 미안한 표정으로 애써 미소를 지었다.

- 가끔 남자들을 보면 오래전에 돌아가신 아버지라 생각하세요.

어머니를 품에 안듯 부축한 나는 어머니의 가느다란 어깨뼈를 느끼며, 아주 조심스레 한 발씩 천천히 내딛었다.

혜인과 함께 어머니를 방에 눕히고, 그녀가 살아가는 공간을 둘러봤다. 서가에 꽂힌 수많은 책들에 눈길이 멈추었다. 나와 취향이 비슷한 듯한 그녀에게 좀 더 깊은 동질감을 느꼈다. 책을 한 권씩 꺼내보다 뒤에서 느껴지는 온화한 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평온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책을 쥔 손이 뜨거워지며, 그녀의 머릿결을 쓰다듬고 싶은 강렬한 열망을 느꼈다. 그녀와 식탁에 마주 앉아 차를 마시며 책에 관한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냉장고 안에서 이것저것 꺼내어 저녁 식사를 준비했다. 대파가 썰리는 소리, 개수대에서 맑은 물이 흐르는 소리, 간을 맞추는 소리, 전기밥솥의 하얀 밥이 익어가는 소리... 집은 단순한 형태가 아닌 수많은 감각들의 집합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에 대비되듯 내가 살아가는 공간이 연이어 떠올랐다. 그녀가 만든 김치찌개가 왜이리 눈물이 날 만큼 맛있는 걸까. 그녀의 경계에는 불안도 묻어있었지만, 사람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따뜻한 흔적들 또한 산재해 있었다.

- 오늘 고마웠어요.

그녀의 눈빛이 비껴가지 않고 진수의 눈동자에 박였다. 그 눈빛을 피할 수 없었다. 그 눈빛은 불가항력적이었고, 그래서 절대적이었다. 현실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것만 같은 빛에 이끌려 의지와는 무관하게 그녀에게로 조금 더 몸을 기울였다. 그녀는 피하지 않았고 나의 얼굴을 직시했다. 그녀를 향해 느리게 고개를 숙이다, 순간적으로 전류가 흐른 물고기처럼 나는 굳어버렸다.

- 나는 다시 실패할 것이다. 나는 다시 깨뜨려질 것이다. 나는 다시 캄캄해질 것이다.

화들짝 놀란 고라니처럼 다급하게 인사를 하고,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시동을 걸고 백미러를 보았다. 그곳에는 그녀가 온 힘을 다해 여전히 손을 들어 건너다보고 있었다. 낯익은 체념 앞에 나는 고개를 좌우로 미세하게 흔들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고라니는 결국 모든 걸 잃고야 말 것이다.

박혜인씨는 어머니의 병간호를 위해 한동안 출근하지 못했다. 며칠간 그녀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 아니, 연락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상처받았을 것이다. 그녀와 나 사이를 가로지르며 무엇이 흐르는지 알 수 없는 캄캄한 강물 같은 경계. 그 경계에 발끝을 살짝 담갔지만, 유감스럽게도 두려움에 가까운 체념에 젖어 금세 나는 새처럼 발을 오므렸다. 그렇다고 나는 강가를 온전히 떠나지도 못하는 비겁한 인간이었다. 매혹적이고도 달콤해 보이는 것들은 한편으론, 왜 이리도 위험해 보이는 것인가. 시간이 흐를수록 사방이 가로막힌 쳇바퀴에 올라선 기분이었다. 참을 수 없는 답답함이 미안함을 넘어서자 그녀에게 결국 전화를 걸고야 말았다. 한 번의 연결음이 들리고 전화를 받은 그녀는 뜻밖에도 울먹이고 있었다.

- 엄마가... 엄마를... 잃어버렸어요.

- ... 거기 어디에요? 내가 지금 갈게요.

있는 힘껏 달렸다. 울고 있는 그녀를 향해 주저없이 달렸다. 특별한 사람의 울음은 마음을 찢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울음이 쉬어갈 수 있도록 곁을 내어주고 싶었다. 아니, 같이 울어주고 싶었다. 불안한 마음은 가뭇업이 사라지고, 몸은 행동했다. 눈가에 눈물이 가득 고인 박혜인씨를 마주했다. 그녀가 잠시 밖에 나간 사이 어머니가 사라졌다며, 그녀의 토막난 말이 건너왔다. 다급하게 그녀는 저쪽으로, 나는 이쪽으로 나뉘어 어머니를 찾아 나섰다. 한참을 헤매다 마을 시장 어귀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박혜인씨의 어머니를 발견했다. 나는 그녀에게 어머니를 찾았음을 알리고, 어머니를 안아 일으켰다.

- 이제 집으로 같이 가세요.

- 고맙네.

집으로 갈 수 있어 고맙다는 말씀인지, 같이 갈 수 있어 고맙다는 말씀인지, 괜스레 어머님의 말을 곱씹었다. 어머님의 말을 되뇌이며 세 사람이 나란히 집으로 향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러다 문득, 어쩌면 사는 일은 그다지 큰 걸 필요로 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스쳤다. 그저 같이 부딪쳐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곳은 의미가 있었다. 이곳에 부딪치기 위해 그녀가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사는 것처럼 사는 것 같았고, 그녀가 그저 반가웠다. 그리고 하나로 연결된 듯한 충만한 기분이 들었다.

- 여기 있어요. 차 가져올게요.

- 고마워요. 정말.

그녀가 어머니를 씻기는 동안, 마치 나의 집이라도 되는 듯 어질러진 물건을 정리하고, 개수대에 쌓인 그릇들을 씻었다. 어머니를 눕히고, 나와 그녀는 비로소야 안도하듯 고단한 몸을 소파에 깊이 넣어 앉았다. 서로를 마주 보며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었다. 다른 팀의 김주임에 관한 이야기, 옆 부서에 근무하는 어느 불친절한 젊은 직원의 이야기, 유명한 TV 프로그램에 출연한 어느 남성과 여성의 뒷이야기. 그런 소소한 이야기들. 조금 알 것도 같았다. 고라니가 왜 가만히 서 있는 지를. 다가오는 것들이 두려우니까. 하지만 경계를 넘어서고도 싶으니까. 그 사이에서 어떠한 선택도 하지 못해 우두커니 바라보다 소스라치게 놀라 숨어드는 고라니. 나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 그녀의 손에 나의 뭉퉁한 손을 얹었다. 어떤 순서라도 있는 것처럼 이내 그녀의 연분홍빛 입술에 나의 입술을 살며시 포개었다. 이윽고 나의 세상은 다시 한번 낯설어졌다. 또 다른 경계를 마침내 넘었으니까.

경계 너머의 세계에서 또다시 크고, 작은 결정을 하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어쩌면 견딜 수 없는 임계점의 순간이 다시 찾아와 마대자루 안에서 처절하게 핏물을 흘려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의미가 있다면 괜찮은 게 아닐까. 그녀의 따뜻한 체온이 내 몸 곳곳에 전해지자, 어떤 설명할 수 없는 의지 같은 게 생기는 것만 같았다. 트럭에 실린 고라니는 어떻게 되었을까.

오늘도 투명한 어둠 속에서, 어린 고라니 한 마리가 경계 앞에 고요히 서 있다.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는, 사실 아무도 알지 못한다.

(고라니. 완결.)


덧. 나이가 들어서인지 어떤 선택을 하는 일이 두려워지는 듯합니다. 하지만 남아있는 시간에 의미가 되는 일이라면 용기를 내어보는 일도 필요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합니다. 자두꽃은 갓 피어날 때가 가장 예쁜 듯합니다.

작가님들. 독자님들. 항상 강건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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