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량하였던 지난 겨울에망설임없이 훨훨 옷을 벗어버렸던 나목들에게서 저는 오히려 완전함을볼 수 있었고, 무엇하나 단절되지 않은 그들의 체온에서안온함을 느낄수 있었습니다. 그들이말해주는침묵의 향기에서창조와 생명의 소리를들을 수 있었지요. 그들에게서는피워낼 봄을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며, 준비하고 있는 내면의 힘이,딱딱한 껍질을비집고 새어나왔었습니다. 봄의빛을 타고 연녹의 향연을 고요하게 연주하는그들의 오케스트라는 신비롭고도,아름다웠습니다.그런그들에게서 배어나오는고요함은 어쩌면 강건함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나 모진 겨울을장엄한 나이테를남기며, 생을 준비해 가던 그들의 고요함은 분명, 강건함과 단단함이었습니다.
당신은 소리없는 미소를 지으며, 그들의 밤을 밝혀주고, 지켜주셨겠지요? 낮의 소란스러운 꼬리들을잘라내며, 쉼을 주고, 품어주는 당신이 있기에기적은 싹틔울수 있었습니다.깊은 밤,당신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다행이라는 언어는 당신의 존재에 대한 기쁨과 존경을담은 명징한 저의 진심이며, 당신의마음이 빛이 되어 저에게 전해지고 있음에대한 감사의표현이지요.까만 밤의 붉은 눈은 온화한 당신의 품에서 까무룩 잠이 들었기에 더이상 두렵지 않았습니다. 어느새 당신의 손길을 따라 가닿은 서재터에는 흙 내음과 풀 향기로 가득하였고, 한지에 물이스며들 듯, 저의 몸 곳곳으로 맑게 번져나갔었습니다.한 밤의 뻐꾸기들은 당신의 몸짓을 따라 노래하고있었고, 산비둘기들은 산능선의 곡선을 타고서껑충 뛰어올랐지요.산나무들은투명한 바람에 기대어 춤을추고 있었고,들풀들은사각사각 정겨운 대화를나누고 있었습니다.산책을나선 고라니 가족은 저의 갑작스러운등장에 놀랐는지 황급히 달아나버렸기에 저는 미안한 마음을 품어야 했지만,우리가겹겹이쌓아갈 시간을 함께지나서, 언젠가는 웃으며 서로의 앞에 마주설 수 있으리라생각해 보았습니다. 고라니는 그의 예쁜모습과는 어울리지않는사나운 울음소리를가졌지만,그 또한 자연이 주는필연이고, 조화이겠지요? 겨울철 그 녀석이 먹을 수 있도록 고구마도, 감자도 조금은 남겨두려 합니다. 물론 산새들도 빼놓으면안되겠지요. 겨울은 본디 함께견디어 나가는 계절이니 말입니다.저 또한 당신 덕분에 빈약하고, 거칠었던 지난 겨울을 잘 지나올 수있었고,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니,부디그 자리에서 한결같이그렇게있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서재 터의 건너편 호수는 당신을 따라 부서지는윤슬이 잔잔하게 흐르고있었고,물고기들의 뛰어오르는 기척만이 간간이 들려왔습니다.점이 된 하얀 전등빛아래에서 물고기를낚는 것인지, 세월을 낚는 것인지알 수없는 어느촌부의 시간은 그곳에서 멈춰버린 듯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자연을 만나는 순간은 아마도 시간을 벗어나시간의밖에서 이루어질 수밖엔 없을 것입니다.존재하는모두에게 공평하지만,냉정한 시간의흐름안에서는 자연의 여백과고요한 평화를 느낄수는 없을테니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적요한 풍경을 드리우는 당신의 밤을 기다리고, 사랑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감나무 아래 의자에 앉아, 그의 줄기에가만히귀를 기울여 보았습니다.그리고 저의 속뜰에 물이 흐르도록 해주는 네가 있어 참좋다고 속살거렸지요.구름을 벗어난 당신은 감나무의손길을 놓지 않은 채, 밤을 지우며, 우리를비춰주셨습니다. 지금은 비록 가느다란모습의자작나무들과벚나무들, 몽글몽글 하였던 작은목련들과 팝콘을 닮은 앙증맞은 조팝나무들이지만,그들을품에 한아름 안아볼 수 있을 저의소담스럽기만한,남아있는 나날이 기다려지는 오늘이었습니다.
무해하고도, 순한 향과함께 말입니다.
밤하늘을 수놓은 수만개의 벚꽃들은 일제히 반짝이며,우리들의 인연을 감싸안아 주었고, 살랑이던맑은바람은우리들을 파고 들었습니다. 당신은이런우리들에게 말없이 따듯한 시선을 두셨지요.자연이 알려주는 특별하고도 귀한 인연들에 귀를 기울이며,그들이 말해주는 소리없는 소리에서창조와생명의 숨을 발견하였습니다.타인의 시선에 묶여나아가지도돌아가지도 못하였던 저는,어쩌면 저의 얼굴을 지워버리며, 살아온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생명을존재케하고, 살아내게 하는 일에서 불가해한기쁨과겸허한 충만의 손짓을보았고, 저는 이제서야그 길을 따라가 보려합니다.여러 생에 깃들여진 인연의 흔적들이 쌓여우주는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우리들이 만들어낸인연의 기적에서풋풋한 행복을 발견할 수 있는저의 날개달린 심장이 있음에 감사한오늘이었습니다.
'빅토르 위고'는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행복은 우리가사랑받고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깊고 깜깜한 밤을 닦아내며, 우리를 비춰주는당신에게서 제가 사랑받고 있음이 온전히 전해집니다.비록 가닿을 수 없는 당신이지만, 물리적거리는중요하지 않습니다.당신과 나의 시선이 서로를 담고있으니 말입니다. 보고 있어도 그리운 당신을 그리워하며,저의 하루를고요히 닫아보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