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이설 Jun 30. 2023

정말 달리면 달라지나요?

우울증 환자의 생존을 위한 달리기

“이제는 살기 위해서 걷고, 달려야 합니다.”     


한동안 상담을 할 때마다 매번 같은 말을 들었다.


‘무기력해서 일어나 걷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어떻게 운동을 하라는 건지….?’


진료실 바닥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선생님의 눈을 피하기 바빴고, 영혼 없는 “네 그럼요. 해야죠.”를 반복하는 네무새가 되어 그저 빨리 상담시간이 지나기만을 마음속으로 빌었다.


"안 하실 거 아는데, 저 믿고 한번 만이라도 달려보세요.”     


그날도 어김없이 주치의 선생님은 똑같은 말을 했다.     


매일 귀에 딱지가 생길 정도로 들었던 말이었는데, 그날은 이상하게도 선생님의 말이 한쪽 귀에서 한쪽 귀로 흘러가지 않고 머릿속에 잠시 멈췄다.


‘정말…. 달리면 달라질까?’     


몇 년째 집에만 있다.

병원 가는 시간 말고는 집 밖을 나가지 않는다.

매일 인터넷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히키코모리진단법'을 검색하면서도 집 밖을 나가지 않는 나는 어쩌면 정말로 히키코모리일지도 모른다.


병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굳이 밖에 나가야 할 이유가 없었다. 이런 나에게 걷기도 아닌 심지어 달리라는 말은 어림도 없는 말이었다.  


“달리면 정말 달라질 거예요. 안 좋은 생각도 사라지고요.”      


그날따라 주치의 선생님의 말이 왜 그렇게 간곡하게 들렸는지. 선생님의 말을 도저히 뿌리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덜컥 약속을 해버렸다.      


“네, 그럼 한 번 해볼게요.”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온 그날 저녁.

얇은 바람막이를 걸쳐 입고, 러닝의 필수 아이템인 에어팟을 챙겼다. 그리고 오랫동안 신지 않아 용도를 잊은 채 집에 처박혀 있던 러닝화를 빼 신었다. 일단 급하게 집에 있던 아이템으로 장비발을 갖춘 뒤, 어스름한 저녁 집을 나섰다.      


걷는 건지 뛰는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느릿느릿 뛰기 시작했다. 심장박동수가 조금씩 빨라지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속도를 높여갔다. 그동안 바깥 활동 없이 집에만 있었던 저질 체력을 여실히 보여주듯 한 발 한 발은 돌덩이처럼 무거웠다. 발이 껌인 양, 땅에 달라붙는 듯 쩍쩍 올리고 내리며 힘겹게 뜀박질을 해댔다.


5분....., 10분..... 아니 정확히는 10분도 채 안 돼서 심장이 터질 것 같았고, 종아리는 찢어질 것 같았다.      


'아 포기할까......'


하지만 왜인지 지금 당장 달리지 않는 것보다 내일 상담을 하며 또 달리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 더 싫었다.


뛰고, 걷고


뛰고, 걷고


이상한 오기가 생겨 마음을 다잡고는 다시 빠르게 걸었다. 계속해서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네 정거장 정도를 지나왔다. 버스정류장을 기준으로 다섯 정거장 정도의 길이를 찍고 오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오른쪽 도로가에는 열심히 차들이 달리고 있었고, 눈앞에는 빨갛게 저울어가는 노을이 있었다. 그 노을만 바라보며 앞만 보고 달렸다. 처음 터닝포인트를 찍기 위해 달릴 때는 내 몸의 호흡과, 발동작에 집중하느라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없었다. 게다가 애플워치는 또  얼마나 똑똑한지 신호가 걸려 잠시 서 있기만 해도 심장박동수와 움직임이 멈추는 바람에 신호등 앞, 신호대기 상태에서도 종종걸음으로 계속 움직여야 했다.


그렇게 얼마쯤 달렸을까.

목표했던 반환점을 돌아 집으로 다시 돌아가며 또 뛰고, 걷고를 반복하다 우연히 옆을 돌아봤다. 그러니 주변의 것들이 하나 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잠시 잊고 있던 세상이었다.


버스정류장 앞 자주 갔던 붕어빵 가게, 새로 생긴 예쁜 카페, 밤늦게도 사람들이 많은 역 앞, 닭 튀기는 맛있는 냄새가 코끝에 감도는 자주 가던 치킨집 그리고 요즘은 구경하기 힘든 예쁘게 단장한 공중전화박스까지.    


문득 내가 숨어있던 시간에도 세상은 여전히 흘러가고 있었고, 그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혼자만 멈춰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우울해지려는 찰나,

또 달렸다.      


그렇게 40여 분의 달리기를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녹초가 되어 집에 들어오자마자 현관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하지만 기분은 한결 가벼웠고, 하루 내내 머릿속을 채워 괴롭히던 '죽고 싶다는' 생각도 잠시 잊었고, 심지어 뿌듯함마저 느껴졌다.


‘선생님이 말했던 것이 이런 것일까?’      


하지만 그날 이후 달리기는 작심삼일로 끝이 났다. 여전히 나는 무기력감에서 헤어 나오지 못해 방에서 나가지 않고, 햇볕이 보기 싫어 블라인드를 내린다. 병원을 가기 위해 외출하는 일 말고는 집 밖을 나가지 않는다. 선생님의 '달리기' 처방을 미루고 또 미루며.       


가끔 침대에 누워 생각했다.

단단히 마음먹고 달렸던 그날의 나를 기억했다.      


힘들면 걷고, 제 숨으로 돌아오면 또다시 뛰며 오로지 내 몸과 숨소리에 집중했던 시간.

그 시간만큼은 불안과 우울함과 고통이 잠시 잊혔던 시간.

무언가를 해냈다는 기분에 뿌듯하고 벅찼던 마음까지.


생존을 위해 달렸던 40분의 달리기가 나에게 꽤 많은 것을 남겼다는 것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