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이 가져온 인간관계의 변화
가장 힘들 때 옆에 있어주는 사람이 진짜 내 사람이라는 세상 진부한 말. 그 말이 살면서 내 인생에도 적용되리라는 것을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그저 주변의 관계에 늘 진심이었기에 그들도 나처럼 진심일 거라 믿었고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오만이었다.
사랑하는 가족을 이 세상으로부터 떠나보내고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기분을 처음으로 느꼈을 때. 일이 고꾸라져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집에 처박혀 좌절하고 있을 때. 갑자기 찾아온 우울증으로 하루하루 마른 가지처럼 메말라가고 있을 때. 정작 위로가 필요하던 때에 마음을 주고, 진심을 다했던 그들은 내 옆 자리에 없었다.
우울증을 앓고 난 뒤, 혼자 동굴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인간관계에 대한 회의감을 느꼈다.
한 명, 한 명씩 나와 관계된 그들의 얼굴을 그려보며 생각했다. 어떤 이가 진심이었을까. 혹은 내가 그들에게 주었던 진심만큼 그들은 내 진심을 소중하게 여긴 적이 있었을까.
그리고 빠르게 결론지었다.
그들과의 관계에서 늘 먼저 내어 주고 진심을 다했던 그들을 향한 나의 마음을 하나씩 내려놓아야겠다고. 그냥 솔직히 말해 인간관계의 모든 것을 다 그만두고 싶을 만큼 아프고, 지쳐있었다.
늘 관계에 최선을 다했다. 그래서 더 이상 후회조차 남지 않았다. 결국엔 나 자신을 위해 피로도가 쌓인 관계를 말끔히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불필요한 인연을 끊어냈다. 최선을 다한 쪽은 후회도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 어느 때보다도 내 삶의 모든 이들과의 관계에 용감해졌고, 기꺼이 혼자가 되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이제 더는 두렵지 않았다.
우울증에 걸리고 난 이후 처음 느껴보는 자유로운 순간이었다. 나에게 집중하고 내면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늘어가면서 오히려 관계를 보는 눈이 정확해지고, 홀가분해졌다. 거듭 실망하는 관계, 일방적으로 이해하는 관계, 진심이 닿지 않는 가짜관계에 대해 냉정해졌다.
관계에 용감해진 나는 어쩌다 내게 온 우울에게 감사했다.
아프지 않았더라면, 또 나에게 불행이 오지 않았더라면 모르고 지나쳤을 소중한 과정을 겪었다. 아니 어쩌면 우울증에 걸리기 전 나의 삶에도 순간순간마다 가짜관계를 걸러낼 수 있는 기회가 수없이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 하필 우울증에 걸린 지금에서야 알아버린 눈치 없는 나의 이성에 조금 실망스럽기도 했지만, 오히려 우울증이라는 명분이 생겼기에 이 모든 것이 가능했던 일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나 진짜 깜빡 속을 뻔했지 뭐야? 네가 진짜인 줄 알고.'
하고 말면 그만이었다.
맞지 않는 관계를 끊어내고, 거짓된 관계를 멀리하고, 일방적으로 헌신하는 관계에서 빠르게 도망칠 수 있었던 것. 그 지름길이 슬프게도 나의 불행이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다. 하지만 이것은 어쩌면 세상의 이치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세상의 이치가 남긴 또 하나는 가짜관계를 걸러내고 나면 진짜관계가 남는다는 사실이다. 내 곁에 남은 몇몇의 그 누군가는 나를 진심으로 걱정했고, 나의 아픔에 함께 아파했고, 진짜 위로를 건넸다.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에도 진짜인 그들의 얼굴이 떠오르니 눈시울이 붉어지려 한다. 차라리 아프길 잘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정말 철없게도 말이다.
그러니 우울증에 걸렸다고 아파만 하지 말고, 잠시 불행이 왔다고 울고만 있지 않기를.
어쩌면 지금이 기회일지도 모른다. 깜빡 속을 뻔했던 가짜관계를 눈치채고, 곁에 남은 소중한 진짜관계를 알아챌 기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