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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작 Dec 24. 2017

발표 좀 하는데요



학창 시절에 나는 울렁증이라는 울렁증은 다 가지고 있었다. '친구 사귐 울렁증, 자기소개 울렁증, 발표 울렁증, 질문하기 울렁증, 모임에서 말 꺼내기 울렁증, 노래 울렁증, 영어 울렁증, 남자랑 손잡기 울렁증 등. 얼굴이 빨개져 멍하니 서 있는 것은 대수였고 화기애애한 가족 파티를 망치기도 했으며 100명 넘은 사람들 앞에서 엉엉 울며 질질 끌려내려오기도 했다. 사람들은 그런 나를 동정하듯 쳐다봤다. 집으로 돌아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밤새 뒤척였던 이유는 동정 어린 시선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실망 때문이었다. 나는 왜 저 친구처럼 당당하지도 자연스럽지도 못한 걸까.


'신이시여, 제발 이 기억을 잊게 해주세요.'


어느 날 나는 반복된 기도를 통해 귀중한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반전의 시작이었다. 연약한 마음을 가지고 태어나 실수를 반복하고 어려움이 생기고 상처를 받는 이 모든 상황들이 내가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 짜인 '특별 트레이닝 수업'이란 것을 깨달았다. 아무리 많은 돈을 준다고 해도 받을 수 없는 말하자면 영웅을 만들기 위한 귀중한 트레이닝 수업인 것이다. 방구석에 앉아 훌쩍훌쩍 울던 중학생 소녀는 갑자기 미소 지으며 방 문을 열었다(방문 틈 사이에서 번쩍이는 빛이 났다는 항간의 소문이..). 그리고 그 날 이후부터 나에게는 큰 변화가 있었다. 


'마땅히 실수하고 멋지게 이겨내기로 했다.'


그 후부터 사람들 앞에 나설 수 있는 자리에 나를 강하게 내몰았다. 물론 울렁증을 극복할 수 있는 여러 준비를 하면서 말이다. 작은 팀 발표부터 교수님들이 한 자리에 모인 세미나, 1000명 이상이 모인 대강당 무대 위에 나는 '나로' 당당히 서 있었다. 나는 계속되는 실패 속에서 하늘에 올려다보며 말했다. 


'이번엔 좀 강도가 센데요? 그래도 이겨낼게요. 다음번엔 잘 좀 해볼게요.'하고.

나이가 들어가며 나는 청중이 나를 괴롭히려는 존재가 아니라 나와 함께 가치 있는 시간을 보내려는 '나와 같은 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누군가의 가족, 누군가의 친구이며 어딘가 부드럽고 연약한 감정을 가진 나와 같은 한 사람. 나이가 많든 적든, 직위가 높든 낮든 상관없이 그들은 나에게 소중한 시선을 보내는 고마운 사람인 것이다. 이런 생각은 청중 앞에서 멋진 모습을 보여야겠다는 생각을 넘어 함께 행복한 시간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바람으로 이어졌다. 


지난달 나는 회사에 꽤 큰 실적을 올렸다. 규모가 있는 기업의 임원급 인사들이 모두 참여한 자리였고 나는 우리 회사를 대표해 기획을 발표해야 했다. 몇 달 동안 모든 직원들이 주말을 반납하고 준비했던 것이기에 애정이 컸고 반드시 잘 해내고 싶었다. 하지만 우리 뒤에는 쟁쟁한 10팀이 기다리고 있었다. 양복을 쫙 빼입은 멋진 발표자들이 하나 둘 대기실에 모여 있었다. 


문이 열렸고, 심사위원들이 엄숙한 분위기를 조성하며 앉아 있었다. 나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들어갔다. 같이 간 회사 동료들이 내 뒤에 앉아 있었고 싸인을 맞추고 발표를 시작했다. 그 순간 들었던 생각은 이것이다. 


'아, 무대가 열렸구나!' 


5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심사위원 한 분이 계속 휴대폰만 쳐다보며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나는 그에게 미소 지으며 호기심이 들만한 포인트들을 집어서 이야기했다. 진심으로 그들과 대화하려 노력했다. 청중과 함께하고 있다고 느낄 때쯤, 그가 날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박수를 받으며 무대를 내려왔다. 6년 전, 눈물을 뚝뚝 흘리며 후들거리는 다리로 무대를 내려오던 내가 '특별 트레이닝 수업'을 한 단계 마친 것이다. 


비단 발표에서 뿐만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다. 


타인보다 우리가 겪는 고통이 유독 심하다 느낄 때 우린 그만큼 가치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함임을 기억하자. 자연의 섭리 안에서 우리가 해낼 수 있는 영역이 어디까지인지 아직 확신하지 못 하지만, 


분명한 것은 

사는 동안 우리 스스로에게 

자랑스러운 우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20171224

강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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