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웃고 더 즐길 수 있는 삶을 환영하기로.
서른이라는 나이는 참 신기하다.
누군가 분명 세상의 모든 서른들을 모아 두고 동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삶의 문을 열어준 것이 분명하다. 요즘은 기적(?) 같게도 삶에 대한 시각이 조금씩 열리는 것이 느껴질 때가 있다.
첫 사례로 적당치 않지만 굳이 말해보자면 '죽음'에 대한 것이 그렇다. 20대에는 죽음에 대해 별달리 신경 쓰지 않았다. 평생 살 것 같았고 그것보다 지금 내 앞에 걸어오는 멋진 남자에게 앞머리가 이상하게 보이는가가 더 중요했다. 하지만 30살이 되니, '운이 좋으면 나에게 남은 삶이 2/3 정도가 되겠구나.'라는 생각을 자연히 하게 됐고 삼십 년이나 살았다는 것에 대한 기특함과 동시에 의외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죽음의 순간'에 대해서도 진지한 태도를 갖게 되어서, 기도 목록에 '나이 들으면 평온한 죽음을 주소서'가 추가됐다. 병이 들어 죽게 된다면 꽤 불쾌하겠지만 삶 전체를 놓고 보면 건강할 때가 많았으니 뭐 어쩔 수 없는 일이 되겠지 하고 일종의 체념 같은 것도 하면서.
서른이라는 나이는 무엇보다 '꿈'에 대해 다른 시각을 갖게 했다. 나는 30대야말로 '꿈'이라는 슈트를 걸칠 수 있는 가장 간지 나는 나이라고 생각한다. 20대는 학업을 마치고 사회에 뛰어들어 미친 듯이 발차기를 할 때다. 온몸에 힘을 주고 있어서 아무리 발차기를 해도 앞으로 잘 나가지 않고, 엉뚱한 곳으로 가 머리를 쿵 박기도 한다. 그렇게 물을 옴팍 먹는 시간이 5~6년 지나고 나면 '아~ 몸에 힘을 좀 빼면 되겠구나? 아~ 빨리 간다고 좋은 것만은 아니구나?'라는 생각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때 수영 선생님은 말한다. "내일은 오리발 가져와."
"글쎄요. 저도 제 주관 있는 대요?"
학생일 때 나는 '청춘', '열정', '꿈'이라는 단어만 들으면 가슴이 벌렁벌렁거렸다. 당장 머리에 흰띠라도 감고 세상을 구하는 히어로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고, '야망은 가슴속에만 담아두어라!'라는 교수님의 말에 물개 박수를 쳐댔다. 하지만 광화문 한 도로에서 높은 빌딩들을 올려보며 "반드시 내 꿈을 이루겠어!"라고 외쳤던 이십 대는 사라졌다. 그리고 덜 익은 풋사과는 5~6년간 햇빛을 받아 좀 탔고(?) 좀 단단해졌다.
이젠 번드러지는 높은 빌딩이 내 '꿈'을 반드시 이뤄주는 것이 아님을. 자기계발서에 나오는 꽤 훌륭한 멘토들이 내 '꿈' 자체는 아니라는 것을 아는 나이가 됐다. 예를 들어 책에서 이런 글을 읽었다고 치자. '세모 세모 기업에 다니는 38살의 대표는 이것에 꽂혀 유학을 갔고 글로벌 기업에서 경력을 쌓아 우리나라에서 세모 세모 기업을 차렸다.' 어렸을 때 나는 이런 글을 읽으면 '지금 나는 뭐 하고 있는 거지? 나도 당장 유학을 가고 글로벌 기업에서 경력을 쌓고 기업을 차려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사는 삶이 훌륭하고 옳은 것같았다.
하지만 서른이 되기까지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다양한 삶의 모습을 관찰하며 나는 이 세상에 다양한 종류의 훌륭한 인생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굳이 유학을 가지 않아도, 굳이 잘 나가는 매체에 소개되지 않아도 인생을 자기 나름대로 즐기고 있는 훌륭한 사람들 말이다. 또 내 인생이 겨우 2/3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내가 원하지도 않은데 다른 사람의 꿈을 좇을 필요가 있나?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꿈'이라는 것은 고개를 올려 바라봐야 하는 먼 우주의 별이 아니라, 나의 두 손을 펼쳤을 때 나를 웃게 하는 빛나는 별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책의 25페이지에서 50페이지까지 훅 넘겨버려도 괜찮다. 그것이 당신이 원하는 것이라면. 꼭 다 읽어야만 인생이 훌륭해지는 것이 아니다. 더 웃고 더 즐길 수 있는 삶이라면 환영하기로. 그것이 진정한 꿈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2018.05.29
당신의 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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