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거워했었다
무거워했었다. 약속이 잡혀 있는 날, 혼자 외롭다는 엄마를 두고 나가야 할 때. 취업에 실패한 친구의 고민을 매일 밤 들어줘야 할 때. 아픈 과거를 가진 연인의 상처를 느낄 때. 마음이 통하지 않은 모임에 나가야만 할 때. 나는 사실, 조용히 진공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기적이다'라는 말이 두려웠다.
서운해했었다. 엄마가 언니에게 내가 모르는 중요한 이야기를 할 때. 친구가 내가 아닌 다른 친구와 여행을 다녀왔을 때. 연인이 내가 아니라 자신의 친구와 말이 더 잘 통한다고 했을 때. 마음이 통하지 않은 모임에서 내가 완전히 배제되었을 때. 나는 사실, 작은 외로움을 느꼈다. 그래서 다시 그들과 시간을 보내려 노력했고 점점 관계의 무게로 인해 상처들을 받았다.
'지쳤다가, 외롭다가, 지쳤다가, 외롭다가'
정상적인 관계가 아니었다.
네가 감당할 수 없는 아픔은, 나도 아프더라
워크숍에 가 있을 때였다. 시곗바늘이 11시를 가리킬 때쯤, 왁자지껄한 틈에 나의 폰이 울렸다. 자리를 옮겨 전화를 받자마자 흐느껴우는 친구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 때문에 힘들 때면 늘 전화를 하던 친구였고 이번에도 회사에서 큰 실수를 한 모양이었다. "지혜야, 나 때문에 퇴근한 사람들이 다시 회사로 복귀했어. 내 실수 때문에! 나 바본가 봐. 어떻게 해? 나 어쩌지?" 볼에 닿은 액정의 온도가 점점 올랐다. 전에도 비슷한 전화를 여러 차례 받았었다. 그때마다 나는 어떻게 하면 친구가 이 문제를 풀 수 있을까 진지하게 고민했고, 실수를 노트에 적어보라고 하든지 선배에게 도움을 요청해 봐라 같은 나름의 조언을 해주었다. 하지만 이번에 친구는 또 실수를 해버렸고 나는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폰 너머로 흐느끼는 소릴 듣고만 있었다.
사실은 그때 조금은..
내가 결코 해결해줄 수 없는
관계의 무게가 무겁다고 느꼈다.
점점 외로워진다는 엄마의 무게와 취업이 안돼 속상한 마음을 내게 심하게 다그쳤던 친구의 무게를 감당하기 힘들었다. 내 답을 기다리는 친구에게 '친구로서' 해줄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나는 네 단짝 친구고, 너의 문제가 해결된다면 뭐든 해줄 수 있어. 하지만 나도 지금 현명한 조언이 떠오르지 않아. 너도 알지, 마음으론 네가 스스로 이 문제를 이겨내야 한다는 거.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하나야. 내가 네 친구로서 끝까지 옆에 있어주겠다는 거. 최선을 다해. 그래도 실수가 반복되어 잘리면? 친구가 있잖아! 너 그냥 죽게 내버려 두지 않아."
눈물이 맺혔다. 친구의 볼에 닿은 액정의 온도도 점점 올라가는 것 같았다. 친구는 더 크게 울더니, 조용히 여백을 두고 네가 내 친구여서 감사하다는 말을 해주었다.
옆에 있어주는 것
고등학교 1학년 때 나는 지금보다 더 마른 아이였다. 그런 내가 얼떨결에 친구의 추천으로 반장이 되었고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첫 수업의 인사를 하기 위해 일어났다. 목소리가 카랑카랑하신 젊은 국어 선생님은 대표로 일어나는 나를 보고 미간을 찌푸리며 웃었다. 그러면서 "얘들아, 너희 반 어떡하려고 그러니~ 저렇게 마른 애를 반장으로 뽑아두면 잘 돌아가겠니?"라고 말했다. 장난이 섞인 비웃음이었다.
그 후 나는 끔찍한 한 학기를 보냈다. 친구들은 반장으로서의 나를 완전히 무시했고, 내가 반으로 들어와야 한다고 해도 운동장에서 뛰어놀았다. 투명인간 반장. 무리 지어 나를 놀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중학교 때까지 전교에서 소문났던 내 성적은 아래로 돌진했다. 그래도 나는 창문으로 뛰어내리지 않았다. 뭐, 그럴 용기가 없었던 것도 그렇지만 그보단 더 고마운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일한 친구.
덩치가 큰 친구들이 "쟤 봐라. 쟤"하고 놀릴 때도 (여론에 의해 휩쓸리지 않고) 내 옆에 그냥 있어준 친구. 그 친구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한 학기를 버틸 수 있었다. 친구는 내게 별다른 조언을 하지 않았다. 이 상황은 그녀가 나서서 해결해주지 못하는, 나 스스로 감당해서 이겨내야 한다는 것임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급식실에서 함께 줄을 서줬고, 체육을 못하는 내 옆에서 끝까지 함께 달려줬다. 그게 다였다. 그것이 위기를 스스로 극복하고 나로서 일어설 수 있게 해 준 모든 것이었다.
나는 여전히 관계에 있어 소중한 사람이고 싶다. 그래서 먼저 연락을 하고, 잘 지내냐 묻고, 선물을 사고, 도움을 줄 방법을 찾고 있다. 하지만 상대의 감정이 혹은 내 감정이 파도를 칠 때 나는 수면 위에 떠서 숨을 고르며 잔잔해지려고 노력한다. 그건 내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서 배를 돌리려고 해도 돌아가지 않는 배임을 알기 때문이다. 스스로 조타기를 움직여 폭우가 몰아치는 구간을 빠져나와야 자신의 바다를 항해할 수 있는 것이다. 때론 이기적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어도 나는 관계에 있어 솔직해지고 싶다.
스스로 조타기를 돌려 나오라고.
하지만 나는 늘 당신 옆에서.
당신의 배가 침몰되게 내버려두진 않겠다고.
엄마에게,
친구에게,
연인에게,
나의 모든 관계에게.
그렇게 말하는 진정한 관계이고 싶다.
2018. 여름
당신의 벗,
강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