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바다

네가 내게 희석되고, 내가 네게 희석되는

Jul 15.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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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아메리카노 원 샷 같은 아픔만

나는 누군가 자신의 자아조차 찾지 못하고 나에게 많이 의지한다고 느낄 때면 조용히 어디론가 사라지고 싶었다. 주말에 나가는 나에게 서운해하는 엄마, 매일 밤 전화해 취업이 힘들다고 말하는 친구, 과거 자신의 아픔을 현재의 연애에 적용하는 연인이. 그들이 자신도 감당하기 힘든 감정들을 나에게 내보일 때마다 나는 더더욱 독립적인 내가 되려 했다. 외롭고, 슬프고, 화가 나는 어두운 감정들을 나 스스로 처리하는 사람. 상대에겐 마시기 버거운 에스프레소가 아니라 원 샷만 넣은 아메리카노 같은 사람이 되야겠다고 생각했다. 스스로 긍정적으로 결론을 낸 아픔을 다독여주는 정도가 딱. 상대의 역할일 테니까.

"여보세요? 지금 통화돼?"

평소에 밖에선 전화를 잘 안 하지만 그날은 정말 화가 나 있었다. 11시가 넘은 시간이었지만 황급히 전화기를 꺼내 친구의 번호를 눌렀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는 시간까지 방금 있었던 황당한 일을 속사포로 꺼내 놓았다. 머리에서 화산이 분출될 정도였기 때문에 말의 온도나 농도 같은 건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내 이야기를 다 들어준 친구는 내게 위로의 말을 건네주었다. "진짜 황당한 경우네? 나 같았으면 그 자리에 있지도 않았어. 너니까 이해해보려고 있었던 거지. 아이고 정말 별별 사람이 다 있다. 나도 있잖아, 예전에..." 그렇게 한 시간을 넘게 통화했을까? 전화를 끊고 집으로 올라가려고 할 때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친구에게 그 늦은 시간에 에스프레소를 건넸고 친구는 나를 위해 꾹 참고 마셔 준 것이다.

사랑의 무게

<작미날 매거진>에 사랑의 무게라는 글을 썼었다. 그때도 내 생각은 서두와 같았다. 나의 자아도 찾지 못한 아픔을 상대에게 지속적으로 쏟아내는 일은 '삶의 균형'에 어긋난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당시 내 마음은 조금 더 지나쳐 있었던 것 같다. 상대가 힘든 이야기를 내게 여러 번 털어놓으려고 하면 마음의 저울을 꺼냈던 것이다. 그리곤 지나치게 내게 의지할 것 같으면 슬쩍 자리를 비웠다. 그것이 나를 위해, 상대를 위해 옳은 것이라 생각했다. 마치 나는 내 자아를 한 번도 놓치지 않을 사람처럼 말이다.

하지만 나도 쓰디쓴 에스프레소를 누군가에게 건넬 때가 종종 있었다. 그 잔에는 잔잔한 내 자아는 없었고 누군가 다독여줘야 하는 흥분한 자아만 있었다. 그리고 상대가 그것을 마셔주면 나는 잔잔한 아메리카노처럼 편안해졌다. 그리곤 요즘 이런 생각이 든다. 나는 내게 배달된 에스프레소를 몇 잔이나 마셔줬을까. 혹 진하고 진한 그 작은 잔을 들여다보다 한번 입술에 갖다 대고는 무서워서 지레 도망갔던 것이 아닐까. 딱 한 잔만이라도 엄마를 위해, 친구를 위해, 연인을 위해 마셔줬다면 금세 너와 나 우리가 편안하게 됐을지도 모르는데.

결국은 희석될 마음의 바다

나는 사람의 마음에는 나름의 농도가 있다고 생각한다. 화가 나면 혈압이 올라가는 것은 마음의 농도가 올라가서 일 것이라고. 어떤 사람은 마음의 농도가 진하고, 어떤 사람은 아주 연하다. 우리는 그 마음의 농도를 정상으로 맞추기 위해 매일매일 스스로도 노력하지만, 누군가에게 내 이야기를 하며 희석시켜 모두가 연결된 마음의 바다로 간다. 우리가 혼자서 살 수 없듯이 혼자서 마음의 농도를 정상으로 희석시키는 것은 어렵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