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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작 May 31. 2021

잘못된 위로

누군가를 위로해주고 싶다면 자신이 스스로 '위로할 자격과 역량'을 갖추었는지 몇 번의 검증을 받아 확인해야 할 것이다. 마음에 상처를 입은 사람은 몸이 다친 사람과 같아서 위로라는 약을 필요로 할 때가 있다. 그러나 자격과 역량을 갖추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처방을 받는다면 그 상태가 더 악화되고 만다. 


나는 이번 일을 겪고서 여러 지인들에게 위로의 말을 받았다. 시럽과 같은 가벼운 말을 전해주는 사람들도 있었고, 마약성 항생제 같은 신경까지 건드리는 말을 전해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중 잘못된 두 가지 케이스를 적어보려고 한다. 왜냐면 이를 글로 남김으로써 나 스스로도 다른 이에게 실수를 범하지 않기 위함이다. 


잘못된 위로의 첫 번째 케이스는 '탓하는 유형'이다. 대수술을 하고 나온 지 삼일 되던 날, 엄마는 그녀에게 전화를 받았다. 휴대폰을 잡기 힘든 엄마는 스피커폰으로 통화를 했기에 나는 옆에서 통화 내용을 모두 들을 수 있었다. 그녀는 엄마에게 전화해서 어떻게 된 상황이냐고 묻더니, 엄마를 꾸짖기(?) 시작했다. "아.. 왜 그랬어.. 그런 거 위험한데 왜 그랬어.. 진짜 왜 그런 거야~" 속상하고 안타깝다는 말투였지만 듣자 듣자 하니 어쩌라는 건지(?). 엄마는 "나도 몰랐지. 건강했는데 이렇게 될 줄 어떻게 알았겠어."라고 싱겁게 넘겼다. 그리곤 전화 너머에선 엄마가 상태를 설명할 때마다 엄청 심각하다는 듯 놀란 탄성을 질러댔다. 이런 걸 불난 집에 부채질이라고 한다고 그녀에게 말하고 싶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사고 전으로 시간을 돌리고 싶은 것은 당연하고, 상태가 심각한 것도 당연히 안다고. 그렇게 우리의 시간을 탓하고 탄성을 자아내지 않더라도 충분히 아프고 있었다고 말이다.

그와 반대되는 케이스의 위로는 이런 것이었다. 엄마의 한 친구였는데 그녀는 전화를 받자마자 엄마의 상태를 듣더니, 자신 주변에 엄마와 비슷한 상황을 겪은 사람들의 호전된 케이스를 들려주고는 "진짜 내가 장담하는데 힘든 일을 겪으면 그만큼 좋은 일이 또 온다. 너 무슨 좋은 일을 받으려고 그러냐~? 고생해라. 많이 힘들겠지만 누구나 살다 보면 아프고도 하는 거다. 나는 뭐 늘 건강만 하겠냐~? 힘내고 도움 필요하면 언제든 전화해라."라고 말했다. 엄마는 그날 밤 잠을 잘 주무셨다. 


잘못된 위로의 두 번째 케이스는 '훈계 유형'이다. 그는 나의 성격상 문제로 나 스스로가 힘들어하는 것을 보는 것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리고 내게 문제가 있는 것을 인식하고 고쳐보는 게 좋겠다고 조언했다. 나는 이 순간 어릴 적 선생님이 내게 한 말이 생각났다. "얘, 공부 좀 해라. 다 너 잘되라고 하는 소리야~" 그가  하는 얘기도 다 나를 위해서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나의 엄마는 간단한 잔소리 빼고 교육이나 나 자신의 성격에 대해서는 훈계나 조언 같은 것을 하지 않았었다. 공부를 하든 말든 신경 안 쓴다는 교육법을 고수했지만, 나는 그런 엄마를 자극하고 싶어 더 열심히 공부했다. 시험을 잘 본 날에 그걸 자랑하면 크게 칭찬을 해주었고- 못 본 날 질질 울고 오면 엄마는 "괜찮아. 시험 못 봤다고 행복하지 않은 건 아니야."하고 말해주었다. 한심하게 쳐다보는 언니에게는 "지혜가 욕심이 많아서 그런 거야."하고 우는 걸 탓하지도 않았다. 심지어 학원에서 수학 문제가 안 풀린다고 울어서 선생님이 엄마를 호출한 때도 있었는데 그때도 돌아와 내게 별 말을 하지 않고 장조림에 고기만 더 먹으라고 할 뿐이었다. '너의 성격상 문제로 네 스스로가 힘들어하는 걸 보는 게 힘들다고, 고치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냥 엄마는 내가 울음이 많은 것이 남들보다 감성이 풍부하며, 욕심이 많기 때문이라고만 설명해주었다. 


"어떤 천성들은 억누르기엔 너무 고결하고, 굽히기엔 너무 드높단다."라고 말하던 영화 <작은 아씨들>의 어머니처럼 그녀는 내가 이 모습대로 아프고 고결하게, 슬프고 드높게 사는 것을 인정하고 곁에 있어주기로 한 것 같았다. 다락방에서 엄마에게 울며 자신의 마음을 이야기하는 극 중 '조'. 그리고 그 모습을 안타깝고 공감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는 엄마. 


슬픈 사람들은 사실 다 안다. 자신을 힘들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런 사람들에게 필요한 위로는 어떤 말이 아니라 언제나 그러한 그들 곁에 있어주는 것, 슬픔의 눈물로 꽃을 피워내도록 사랑해주는 일이란 걸- 나도 이제야 좀 알게 됐다. 



글. 강작(@fromkangjak)


추신. 사실은- 서툴러도 위로를 해준 모든 이들에게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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