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영에게
"당신은 위대해져야 합니다. 그것이 당신에게 권력과 쾌락을 가져다주기 때문이 아니라, 본디 그렇게 되는 것이 올바른 일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크건 작건 모든 일에서 위대하고 훌륭해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당신에 대한 내 사랑이 이루 말할 수 없이 크고, 순수하고 고귀하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사랑은 언제나 당신 안에 있는 위대하고 순수한 근원을 이끌어냅니다. 내가 진실로 사랑하는 친구들이 자기가 맡은 모든 일에서 완벽해지기를 바랍니다."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 Helen Knothe Nearing
네가 준 크리스마스 카드 뒤편에 이렇게 적혀있더라. 귀엽고 삐뚤빼뚤한 글씨로 말이야. 나는 항상 작업할 때 사용하는 컴퓨터 옆에 카드를 두고 자주 눈길을 맞추고 있어. 헬렌 니어링의 책을 선물 받아 몇 권 읽어본 적이 있었는데 그녀가 이렇게 아름다운 문장을 썼는지는 모르고 있었어.
다행인 소식을 하나 알려줄게. 어제 남편과 실전 이별 드라마를 찍다가, 대반전으로 함께 껴안고 자는 엔딩을 만들었어. 우리는 최근에 별거를 고민하고 있었거든. 3년간 함께 생활하며 본래 성향 상 맞지 않은 부분과 각자가 가진 부족한 부분 때문에 많이 다투었거든. '신혼 3년은 다들 그래요.'라고 하던데 그 말이 사실 힘든 당사자들에게는 '그렇구나. 우리도 버티자.'로 쉽게 이어지지가 않아. 나는 확 김에 너에게 답장으로 '소영아, 너는 절대 결혼하지 마!'라고 할 뻔했다니까?
나는 일종의 극 F의 성향을 가졌고, 그는 극 T의 성향을 가졌어. 우린 자주 '어떻게 지금 저런 말이 나오지? 어떻게 지금 저렇게 생각하지?'라는 의문을 핑퐁처럼 주고받았지. 물음표들이 많았고 서운하다는 나를 그는 이해하지 못했고, 서운하다고 말하는 나에게 그는 또 서운하고 그런 반복이었어. 그러던 어느 날 나는 F가 T를 이해하는 방법을 어렴풋이 깨달은 거야. 그 말이 진정 무슨 뜻인지 물어보는 거라고 생각했지. 표면적으론 T의 발언이 나쁘게 들릴 수 있어도 실은 그 뜻은 그저 데워지지 않은 '정수'같은 것일 수도 있거든.
좋아하는 집 근처의 카페에 가자고 제안했어. 맛있는 뱅쇼가 있고 포근한 그곳에선 우리의 이야기가 잘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 별거 이야기를 하기 전에, 여보가 나에게 살면서 이해받고 싶은 게 있었어? 그 이야기를 듣고 싶어.
- 음... 이해받고 싶은 거? 모르겠는데. 잘 모르겠으니까 먼저 말해봐. 나에게 바라는 게 있는 것 같은데?
- 아 잘 모르겠다고. 알았어. 내가 먼저 말해볼 테니까. 한번 생각해 봐.
- 나는 내 성향을 이해받길 바랐어. 나는 감정이 풍부한 사람이라, 가까운 사람과 좋은 감정을 많이 주고받아야 행복하다고 느껴. 그래서 대화할 때도, 여행을 가서도 감정을 주고받고 싶은데 그런 게 없어서 때론 답답하고 때론 외로웠어. 하지만 여보의 성향은 감정을 표현하기 어려워하니까,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게 힘들었어.
- 이해해. 그런 성향의 사람이라는 것도 알고 있고. 나는 내가 말하는 것들을 내 의도와 다르게 받아들일 때 힘들었어. 자꾸 다투게 되는 것도 힘들고. 원래는 잠이 별로 없었는데, 지금은 잠이 늘었어. 나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잠을 많이 자거든.
- 맞아, 나는 오히려 잠을 잘 못 자고.
- 그래, 잠을 잘 못 자는 건 몸이 안 좋은 건데.
- 나는 사실 여보가 중간중간 '왜? 그 말을 왜 묻는 건데?'라고 말하는 것도 사실 내 성향 상 서운함이 생기는데- 최대한 여보의 원래 의도가 그런 것이 아님을 스스로에게 주지 시키고 있어. 집에서 A4용지를 두고 숫자를 언급하며 별거 이야기를 한 것도 사실은 서운했는데- 이 카페에 오자고 한 것도 노력을 한 거거든.
- ...
- 나는 여보의 성향을 이해하고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싶은데, 여보는 어때?
- ...
- ...
- 음.. 난 변하지 않을 것 같아.
- 그렇구나. 우리가 서로를 이해해도?
- 이해하면? 그럼 뭐, 변할 수도 있고.
- 그럼 우리는?
- 우리는 뭐?
- 우리는 이해하고 변할 수 있을까? 나는 그러고 싶어.
- 음... 나는.. 늦은 것 같아.
- 늦은 것 같다.. 그건 이젠 함께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뜻이야?
- 응.
- ...
- ...
- 그렇구나. 안타깝다.
- 응.
그 사람이 '응'하고 말할 때 내 시선은 카페 벽면에 놓여있는 식물에 있었어. 그의 입에서 이별이란 단어가 나온 건 연애할 때도- 결혼해서도 여럿 있었거든. 그땐 처음부터 나도 감정이 격해져서 울고 이별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발버둥을 쳤는데, 이젠 저 식물들처럼 조용할 수밖에 없었어. 오후 7시 30분. 나는 그 시간 최선을 다해서 우리의 마음속으로 들어간 거였거든.
참았던 눈물을 냅킨으로 얼른 닦았더니 그가 '일어서자'라고 하더라고. 차에서 나는 심하게 기침을 했어. 얼마 전에 독감에 걸린 상태였거든. 그 사람은 또 아무렇지 않게 히터를 틀어주었지. 먼저 차에서 내려서 집으로 올라갔어. 냉장고에서 건조한 오트밀을 꺼내서 찬 우유를 섞었고 막 퍼먹고 있었지. 약을 먹고, 그곳을 빠져나와야겠다는 생각뿐이었어. 그러니까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놓아버린 상황을, 내가 처한 슬픔을 감당할 수가 없었거든. 허겁지겁 짐을 싸고 있는데 그가 와서 왜 이러냐고 막는 거야.
- 여보. 아니. 나는 내가 사랑하는 너를 잃었어. 나는 너처럼 이별 앞에서도 이성적이지 못해. 나는 슬퍼. 마음이 무너져. 무서워.
- 가지 마. 이러지 마 좀. 지금 이 시간에 어디를 가려고 해. 왜 오트밀을 먹어. 밥을 먹어.
- 제발. 이제 나에게 조금도 잘해주지 마. 나 헷갈려. 나 마음이 너무 아파.
(이게 남이야기였으면 진짜 나는 '드라마 같네'했을 거야)
그리곤 내가 약봉투를 가지고 나가려는데 또 그가 벌떡 일어나 막아섰지. 나는 그의 손을 잡고 눈물이 고인채 말했어. '그동안 고마웠어. 나는 너를 평생 못 잊을 건데 잘 살아볼게. 네가 바라는 애기 잘 낳고 행복하게 살아.' 거의 목소리가 안 들리 정도로 울면서 얘기한 것 같아. 그랬더니, 그가 나를 꽉 안았지.
- 미안해. 내가 미안해. 나도 너 없이 못 살아. 내가 개인적으로 힘든 것 때문에 우리 관계가 힘들 거라고 생각했어. 미안해. 미안해. 여보가 나를 이렇게 사랑하는구나를 알게 됐어. 용서해줘.
(진짜 드라마인가)
그제야 다시 나는 깨닫게 된 거야. 그가 자신의 어려움을 잘 말하지 못하고 숨기는 회피형의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는 걸. 자신의 마음을 지키는 게 중요한 사람이었고, 다투는 상황 자체를 버틸 수 없을 정도로 싫어하고 힘들어하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서운한 게 있어도 그냥 혼자 참고 있다가, 어느 정도에 도달하면 그냥 숨어버리거나 놓아버리는 사람이었다는 걸. 그게 오래전부터 그 자신과 나를 힘들게 했다는 걸. 그렇지만 결혼을 하곤 조금씩 서운한 걸 표현도 해보려고 시도해 보고 노력했다는 걸.
회피형 습관을 가진 사람 힘들지. 그렇지만 그 사람에게 이건 그저 부족한 문제인 거야. 그도 점차 인식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모두 부족한 것이 있잖아. 강도의 다름이 있긴 하지만. 생각해 보면 나 또한 청결에 민감한 문제가 있거든. 그럴 때마다 가까이 있던 그가 나를 이해해 주었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는 걸.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그를 도와야 할까. 고민했어.
'당신에게 사랑의 안전지대가 되어줄게요. 서운한 게 있으면 편하게 말할 수 있는, 도망가고 싶은 순간에도 다시 나에게 올 수 있는.'
여기까지야.
네가 카드에 써준 헬린 니어링의 이루 말할 수 없이 크고, 순수하고, 고귀한 사랑을- 네가 나에게 전한 사랑이- 그에게 닿기까지의 과정. 드라마 같았지? 결혼은 참 쉽지 않다. 그래도, 한 번쯤 해볼 만하다고 말해줄게. 소영아. 감기 조심해. 내 곁에서 힘이 되어줘서 고마워. 고맙다는 말 코를 골면서까지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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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강작으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