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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친 겸손이 주는 용기

by 강작


지나친 겸손이 주는 용기



어느 가을날, 북촌에 있는 그녀의 전시실에 방문했다. 온라인 모임을 통해 알게 된 그녀는 나보다 나이가 좀 더 많았고 선한 웃음과 도사 같은(?) 예술성을 가진 특별한 사람이었다. 자연물을 관찰하며 꾸준히 그려나가는 예술을 하고 있었다. 그 당시 전시 주제는 '감'이었다. 그녀 집 앞에 있는 감나무를 관찰해서 감의 모습을 일 년간 그린 것이었는데 거대한 완성작을 보니, 찌그러진 감과 벌레 먹은 감이 유독 특별하고 예뻐 보였다. 놀라운 관점을 선사한 작품 앞에서 나는 그녀에게 쌍 따봉을 날렸다.

그녀는 전시실 안 쪽 작업실로 나를 데려갔다. 화가의 작업실. 언제나 동경하는 곳이다. 기름이 섞인 물감 냄새, 텁텁한 나무 냄새, 차가운 공기 그 와중에 따뜻한 차 같은 것들이 기분을 몽글하게 만든다. 북촌이라 창가 너머로 산의 절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이런 곳에서 그림을 그리는 도사라니! 존경심이 우러나왔다.


그때 그녀가 어디선가 나무 위에서 꺾어 왔는지 감이 달린 나무 가지 하나를 가져오며 말했다.


- 이거 우리 그리면서 놀아요!


- 네?!


그림과 나는 너무 먼 친구 사이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만난 때가.. 22살 남자친구에게 강아지 그림을 그려서 선물했던 때였나(꽤 호의적인 칭찬을 받았다)? 그 후로 10년이 넘게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생각을 표현하는 나의 스타일 도구는 붓보다 펜과 키보드였고, 글을 쓰는 것도 갈고닦아야 할 길이 멀고 멀어 그림까지 넘보지 못했던 게 아닐까 싶다. 하지만 언젠가 그림을 그려보고 싶다는 소망을 늘 품고 있다. 이유는 거창하지 않다. 화가가 멋있어 보여서. 나무에 달린 감 하나, 땅에 박힌 돌 하나를 그렸는데 작품 안엔 세상의 이치가 다 들어있는 것 같이 느껴졌다. 그 신비로운 재능과 멋 앞에서 나는 쉽게 반하고 말았다. 어쨌든 내 앞에 하얀 스케치북과 크레파스 조각들이 놓여있었다. 크레파스 하나를 집어 들고 이제 나는 나 때문에 목숨을 바쳤을 수 있는 이 감의 초상화를 그리는 것이다.


도사는 벌써 슥슥 거침없이 그려나갔다. 하지만 나는 첫 선을 그리지 못한 채로 버벅거렸다. 맞다. 이것은 과거의 내 모습이다. 어린이 대공원 그늘에 앉아 펼쳐진 사생대회. 얇은 돗자리 아래 깔린 돌들이 작은 엉덩이를 들썩이게 했고 내게는 엄마가 사준 500원짜리 새 스케치북이 놓여있었다. 언니가 쓰다가 물려준 팔레트에는 이미 딱딱하게 굳은 물감이 박혀있고, 나는 아코디언 물통 안에 든 붓을 집어 들고 선생님께 묻는다. '선생님 뭘 그려요?' '앞에 보이는 풍경을 그려라.' 그게 다다. 친구들은 열심히 그려댔다. 어떤 친구는 나무의 잎사귀부터 어떤 친구는 사람을.. 나는 한참을 그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가 한 작품을 다 그렸을 때 여전히 나는 흰 도화지였다.


- 저 자신이 없어요..


그랬더니 그녀가 갑자기 아이처럼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 지혜 씨, 저도 막 하는 거예요! 저 되게 못해요! 그냥 이렇게 하는 거예요. 하하하하하하하하하.

- 정말요? 잘 그리시잖아요.

- 저 보는 눈 없어요. 하하하하하하하. 그리고 싶은 대로 그리는 거예요.


그녀의 웃음이 너무 순수하고 순박해서 나는 그 말을 믿고 싶어 졌고, 나도 드디어 선을 휙 그렸다. 그리는 와중에도 그녀는 '지혜 씨 앞에서 나 못 그릴까 봐 떨린다' 하고 말했고 나는 왠지 그런 말들에 이상하게 용기가 났다. 그리고 드디어 감 그림을 완성했다. 그녀의 그림이 역시 훨씬 멋졌지만, 내 그림도 멋졌다. 나는 심지어 도사에게 '제 그림 잘 그렸죠!'하고 뽐내기도 했다. 그랬더니 그녀는 '오~! 진짜 멋지다!'하고 무한 칭찬을 해주었다.


겸손이 이렇게 멋진 단어였던가. 나는 그녀와 그녀가 가진 겸손 능력에 놀랐다. 단번에 나에게 자신감을 심어준 것이다.


악동뮤지션의 이수현 가수가 이효리 가수와 대화 중에, 둘이 과거에 만날 수 있었던 때가 있었지만 이수현 가수가 일이 있어 안 와서 못 만났다고 이야기하는 영상을 봤다. 그때 이수현 가수가 이렇게 말하며 청중의 웃음을 자아냈다.


"헉! 저따위 가요?"


뭐든 지나치면 좋지 않다는 말이 대게 맞다지만, 지나친 겸손은 때론 누군가에게 용기를 주고 웃음을 준다. 알고 있다. 감 그림을 그리는 그녀도, 고운 목소리로 노래하는 가수도 자신 안에 단단한 자존감이 있다는 걸. 아무리 지나치게 겸손해도 그것이 긍정적인 에너지로 빛날 수 있다는 걸. 부러운 마음이다. 무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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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2.09

작지만 확실한 반항일지


글 강작 insta. @anyway.kkjj



함께 해주시는 독자분들, 감사합니다. 곧 매거진의 글은 브런치 북으로 옮기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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