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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러워서 피합니다

by 강작


더러워서 피합니다



얼마 전 기상캐스터 고 오요안나씨가 사망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그녀가 남긴 유서 내용에 따라 사망의 주요 원인이 직장 내 괴롭힘이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직장 내 괴롭힘. 성숙하지 못해 불쌍한 사람들로 인해 또 한 사람이 희생되었구나, 하고 한숨이 나왔다.


10년 전쯤 첫 회사를 입사했을 때 나도 직장 내 괴롭힘을 당했다. 나는 경영지원팀의 일원이었고, 나를 괴롭힌 사람들은 비서팀과 회계팀 직원들이었다. 그들은 따로 팀 방이 없어 거의 한 팀 같은 느낌이었다. 여자가 대부분이었고, 남자도 한두 명 있긴 했다.


나는 일을 잘하고 싶고, 사람들과도 같이 잘 지내고 싶지만 직장 생활에 서툰 면이 있는 신입이었다. 그들이 말하는 '실수'를 할 때마다 나는 죄송하다고 말했다. 서럽게 울기도 했다. 고 오요안나씨의 채팅창에서 처럼 이미 나를 죽도록 미워하는 그들에게 계속 용서를 구했다. 밤늦게 퇴근하는 지하철 안에서 나는 창밖을 보며 부족한 나 자신을 자책했다. 출근길엔 자꾸만 넘어지고, 버스만 타면 속이 울렁거려 구역질을 했다.


그렇게 다시 회사를 가면 탕비실이며 회의실에서 나를 욕하는 소리가 들렸고(비서팀 팀장이 우두머리였다), 내가 복도를 걸어가기만 해도 수군거리며 표정을 찡그리고, 워크숍에 가면 내 가방이 문 앞에 짐짝처럼 던져져 있었다. 심지어 회계팀 남자 직원은 성희롱 발언까지 했다. 그런데 나는 그런 상황을 마주하면 기분 나쁘고 화나기보다는 슬펐다. 기분 나쁘고 화나려면 '나에 대한 당당함'이 있어야 하는데 신입인 나는 모든 것이 내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지혜 씨는 어떻게 회사 다녀요? 나 같으면 그만둘 것 같은데.'


내 후임으로 들어온 남자 직원이 퇴사를 하겠다고 말하고, 같이 점심을 먹는데 내게 말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러게나 말입니다.'라고 말할 것 같은데, 그때는 그냥 빙그레 웃으며 '다녀야죠.'했다. 아마 현재도 직장 내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직원한테 '당장 그만두세요.'라고 말해도 그들에겐 잘 안 들릴 수도 있다. 가족에게도 힘듦을 토로하지 않았다. 그저 내 일이니까 내 손에서 해결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회계팀으로 입사한 남자 직원과 방향이 같아 종종 같은 지하철을 타고 퇴근했다. 지하철 안은 사람들로 꽉 차있었고, 우리는 겨우 두 자리를 찾아 앉았다. 사람들의 피곤한 땀 냄새가 사이사이 배어있었다. 그는 외국에서 오래 살다가 입국해 들어온 첫 회사했었는데, 곧 퇴사할 예정이었다. 마른 몸에 조용한 그는 평소 말이 거의 없어서 우리는 인사만 나누는 사이였다. 그런데 그날은 그가 내게 먼저 말을 걸었다.


- 지혜 씨.

- 네?

- 이 회사 이상하네요.

- 뭐가요?

- 대표도 이상하, 사람들도 이상해요.

- 하하..

- 지혜 씨도 이상해지려고 해요.

- 네?

- 싱싱한 과일 옆에 썩은 과일 여러 개를 두면요 어떻게 될까요?

- 같이.. 썩겠죠?

- 네.

- 제가 싱싱한 과일이라는 거예요?

- ...

- 저는.. 저는.. 제가 잘 못하고 있는 것 같거든요.

- 실수했겠죠. 저도 실수했고요. 그런데 그 사람들.. 너무 과하지 않아요? 이상하지 않냐고요. 이상한 곳에서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는 외국 생활하면서 배웠는데- 그곳을 벗어나는 방법이 가장 현명하더라고요. 더러우니까 피한다라는 속담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에요.


그가 모니터에 폴더로 물음표를 띄우고 퇴사한 후에도 나는 3달을 더 다녔다. 그들이 말하는 내 잘못을 고치면 잘 될 수도 있을 거라는 희망, 만약 그들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퇴사하면 부족한 인간으로 내 인생에서 낙인찍힐 것 같은 두려움이 망설이게 했다. 나와 비슷하게 입사한 동기들에 대해서는 그들이 호감을 보이고 잘해주는데 나만 괴롭힘을 당한다는 게 더욱더 '내 잘못'으로 매몰되게 만들었다.


'실수했겠죠. 그런데 그 사람들.. 너무 과하지 않아요? 이상하지 않아요?'


괴롭힘이 더 해질수록 그의 말이 마음속에 더 크게 울렸다. 그들이 이미 썩은 과일일 수 있다. 더러워서 피한다는 속담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너무 과하지 않아요? 남을 험담하고 괴롭히는 게 올바른 인간관계의 태도일까요? 이상하지 않아요? 그렇게 생각하니 점점 이상한 부분들이 생각났다. 내가 학벌이 좋다는 이유로 회계팀, 비서팀 신입들보다 월급을 조금 더 받는다는 이야기가 들려왔고, 대표가 유독 나 같이 둥글게 생긴 사람을 좋아 한다라나, 그래서 대표가 자꾸 나를 부른다거나 등등. 실수를 한 부분도 그랬다. 실수했고 죄송하다 말하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는데도 그들의 험담과 나에 대한 미움의 크기는 달라지지 않았다.


거의 다 썩을 뻔했던 나라는 과일 옆에서, '썩은 과일로부터 떨어지세요.'라고 말해준 싱싱했던 과일. 그 덕분에 나는 깨닫고 용기를 낼 수 있었다. 퇴사를 하고, 계속 회사에 다니던 동료로부터 이야기를 들어보니 내가 나간 후에 또 다른 여직원을 타깃으로 잡아 괴롭혀서 울고 불고 했단다. 회사는 내부에서 불법을 저질러 망하기 일보직전까지 갔고 어쩔 수 없이 퇴사하는 직원들에게 퇴직금도 못 주었다고 했다.

반면 나는 퇴사 후에 그보다 규모는 작았지만 내실이 튼튼하고 성숙한 사람들이 있는 곳에 입사하여, 뭐든 잘하는 직원으로 사랑받으며 회사 생활을 즐겁게 오래 해나갔다.


아직도 나에게 성희롱 발언을 했던 회계팀 남자 직원이 퇴사한 내게 인사 안 하고 갔다고 '길에서 만나면 뒤통수에 돌 안 맞게 조심해라.'라고 문자를 했던 것이 떠오른다. 이젠 불쌍한 마음이 든다. 그렇게 악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봤자 자기만 손해인 것을. 참 안 됐다 싶다.


고 오요안나 씨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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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2.17

작지만 확실한 반항일지


글 강작 insta. @anyway.kkj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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