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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되고 나는 안 되는

by 강작

너는 되고 나는 안 되는 것



결혼하기 전에 내 인생은 내 마음대로 했다. 내가 벌어 내가 사고 싶은 걸 사고, 떠나고 싶은 곳으로 떠나고, 살고 싶은 곳에서 살고, 하고 싶은 일을 했다. 결혼 후엔 인생의 동반자가 생겼으니 내 인생의 대부분을 그와 상의해 결정한다. 이런 점에서 사람들이 내게 어떤 사람과 결혼해야 하느냐하고 물으면 나는 '평생토록 팀플을 함께할 때 쿵짝이 잘 맞을 사람'이라고 답한다(나는 미처 모르고 결혼했지만...).


하지만 정신없이 살다 보면 이런 경우가 발생한다. 내 인생을 잊고 그의 인생을 따라가는 경우. 마치 '당연하다'라고 치부되는 것들이다. 이를테면, 내가 프리랜서라는 이유로 당연히 그의 직장 가까운 곳에 산다. 그곳이 내가 살고 싶지 않은 외로운 오지라고 할지라도. 또, 집안에 차를 두 대 둘 형편이 되지 않으면 내가 차를 사지 않는다. 구두를 신고 전국 방방곡곡 뚜벅이로 다니느라 늘 발톱에 피가 맺힌다고 해도.


나의 친구는 갓 돌이 지난 아이를 위해 권고사직이 보장된 출산 휴가를 냈다. 당연히(?) 내 친구는 여자다. 늘 일에 대한 열정이 대단해 회사에서 실적이 좋은 엘리트 멤버였다. 그녀의 남편이 아닌 그녀가 직장을 포기한 이유는 '당연히' 5년 차 대기업 남편과 15년 차 중소기업 아내의 연봉 차이와 애는 엄마가 봐야 한다는 시어머니의 압박 때문이었다. 그렇게 당연하게 그녀는 집안의 형편을 위해, 애를 위해 자신의 이름을 포기하고 누구의 엄마가 되었다.


- 결혼했으니 상대를 배려해야지. 집안을 배려해야지.


당연하게 강요되는 배려. 이 불협화음 속에 마음에도 이상 증세가 생긴다.


참 안타까운 건, 우리네 엄마들이 대부분 이런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중장년층을 대상으로 수업을 진행하다 보면 대게 공통적으로 이런 말을 한다. 이제는 모든 걸 남편과 자식을 위해, 가정을 위해 모든 걸 배려하지 않고 '나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삶'을 살고 싶다고. 어색하게나마 자신의 이름으로 글을 쓰면서 서서히 잊힌 자신의 삶을 끌어올리는 모습을 볼 때마다 감사하다는 마음보다는, 안타깝고 슬프다.


그들의 꿈은 감사하다는 말을 듣는 것이었을까.



약 2년 전, 우리 부부는 남편의 직장과 멀어진 곳으로 이사를 했다. 내가 외롭다고 말했었지만 친정은 늘 걱정하고 시댁은 크게 걱정 안 했는지 '그냥 거기서 살지...' 하시던 시어머니의 말씀을-(한번 가셔서 살아보셔야) 남편이 '엄마, 내가 편한 곳에서 3년 살았으니 이제 지혜가 편한 곳에서 살아야지.'하고 깔끔하게 마무리 지었다. 우울증에 매일 우는 나를 보는 건 그에게도 큰 괴로움이었을 것이다.


나는 착한 아내, 착한 딸, 착한 며느리, 착한 친구, 착한 작가, 착한 강사, 착한 사람이란 단어 안에 갇히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무엇보다 '나에게 착한 나'가 되고 싶기 때문이다. 배려라는 것은 해주면 고마운 거지 안 해준다고 못된 것이 아니다. 다른 말로 배려는 나를 희생해면서 까지 해야 하는 강요가 아니다.



서로서로 양보하며 사는 것.

그 말이 내가 양보하며 사는 것이 되지 않기를.

정말로 '서로서로'가 되기를.


너도 되고 나도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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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강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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