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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 증후군

by 강작

아저씨 증후군



제목을 쓰고 나니 머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의문이 생긴다. 과연 어디까지가 '아저씨'인 걸까? 내가 스무 살이었던 과거에는 서른만 되어도 아저씨였는데, 지금은 너무나 젊은 청년이다. 아닌가? 지금의 스무 살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서른이 아저씨일까. 그저 내가 나이가 들어 그들이 청년처럼 느껴지는 걸까? 과연 어디까지가 현대판 아저씨인 걸까. 좌우지간 서른 후반이 된 이의 주관적인 관점으로 볼 때 50대부터 60대 중후반까지가 아저씨라고 느껴지니 그것을 기준으로 글을 쓰려고 한다.


얼마 전 한 모임에서 자신이 아저씨 증후군을 가졌다는 사람을 만났다. 그녀는 직장에서도, 생활을 할 때도, 가족 안에서도 '아저씨'라는 사람들에게 피해를 본 경험이 있었다. 그 경험들의 공통점은 그들이 타인을 존중하는 태도가 부족하다는 점이었다. '너희는 그래야 한다'라는 상명하복식 소통을 강요하고, '너희 말은 듣고 싶지 않다'라는 고집불통이 있고, '요즘 애들은.. 젊은 여자들은..' 하는 불평등한 관념에 사로잡혀 있다고 했다. 얼마나 아저씨가 싫었으면 본인의 아버지도 나가서 그렇게 할까 걱정이 된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있으니 나도 정말 뚫어뻥으로 변기 뚫듯 뚫어버리고 싶은 경험이 떠올랐다.


임산부가 가까이 걸어가는데도 뻔뻔스럽게 담배를 피우고 있던 아저씨, 운전 실수를 하는 초보자의 차에 '아줌마! 운전할 거면 똑바로 해! 집에서 애 보면서 밥이나 하지 에이씨' 하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던 택시 아저씨와 고개만 끄덕이던 팀장님 아저씨, 결혼 전 시댁에 인사드리는 자리에서 면전에 데고 '여자 애가 사진엔 못 생겼는데 지금은 그것보다 낫네'하면서 얼평 했던 아저씨, 부인도 있으면서 일 끝나면 여직원들에게 돌아가며 술 사준다고 연락하던 아저씨.


많기도 많았다. 하지만 아저씨 증후군을 겪는 그녀의 말이 공감이 되면서도 뭔가.. 불편하게 들린 건 왜였을까? 그건 내가 앞선 예의 아저씨들과는 다른, '좋은 아저씨'들에 대한 경험을 갖고 있어서였다.


한라산 등반을 하며 지쳐 주저앉은 내게 자신의 등산스틱을 주며 힘내라고 하고 쿨하게 사라진 아저씨, 낯선 여행자에게 맛집, 여행지를 친절하게 알려주던 택시 아저씨, 계곡 물에 빠져 떠내려 가려던 찰나 내 팔을 꽉 쥐고 올려줬던 생명의 은인 아저씨, 먼저 내리라며 엘리베이터를 끝까지 잡아주던 아저씨, '나는 아는 게 별로 없는데, 자네는 훌륭하네'하면서 자신을 낮출 줄 아셨던 아저씨.


내 곁엔 또한 좋은 아저씨들이 많았고, 지금도 그렇기에 그녀의 말에 더 동조해 줄 수가 없었다. 사람의 부류를 병적 증후군처럼 몰아가는 건 위험할 수 있다는 생각. 편협할 수 있는 생각. 그 생각에 갇히기 싫었다.


우리는 '맘충 엄마들' '무식한 아줌마' '싹수없는 요즘애들' '중3병에 걸린 중3' '꼰대 아저씨' '비정상적인 동성애자' '불쌍한 장애인' '나약한 페미니스트' '전라도와 경상도' 등 누군가의 부정적인 경험 속에서 규정된 것들에 거름 없이 노출된다. 노출되고 노출되어 어느새 나도 모르게 '저 연령대는 저럴 거야. 저런 부류의 사람은 저럴 거야.'라는 고정관념을 갖게 된다. 그리고 병적으로 그들을 멀리한다.


하지만 상처로 인해 병이든 건 그런 자신이다. 내 안에 또다시 피해볼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누구나 알다시피 인간은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는 생명체이지만, 한 인간은 다른 인간과는 엄연히 다르다. 내가 경험한 아줌마들이 다 무식했다고 할지라도, 아줌마는 무식하다는 고정관념을 가져서는 안 된다. 분명한 것은 부정적인 경험을 심어준 특정 사람이 미성숙했던 것뿐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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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강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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