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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루미 에브리웨어

by 고똘

10월 31일은 미국 최대 명절 할로윈입니다. 저도 처음 즐겼어요. 친구들끼리 두 차례에 걸친 파티도 했고, 할로윈 장식이 꾸며진 집들을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했습니다. 야간개장을 한 집 앞 미스테리 헌티드 하우스에도 가봤고, 디즈니랜드에서 할로윈 시즌의 퍼레이드도 즐겼습니다. 코스튬도 샀지요. 한국에서의 할로윈을 생각하며, 아마존 프라임으로 과하지않은 여우 머리띠와 꼬리를 구매했습니다.




그런데 후회했어요. 조금 더 과하게(?) 할껄 하고. 여기 사람들은 대충 머리띠 하나 쓰는걸로 끝내지 않습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코스튬을 다 맞추고, 페이스페인팅, 머리 염색도 필요하면 합니다.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 심지어 할아버지 할머니도 코스튬을 합니다. 돈도 아끼지않아요. 우리 설빔 추석빔 살때 나름 거금쓰는거랑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9월부터 여러 자리에서 할로윈 코스튬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길래 주변에 물어보니 “여기서는 1년 내내 할로윈 코스튬 고민을 한다”는 이야기도 했습니다. 아예 자기 집 전체를 귀신의 집처럼 꾸며놓고 관람객을 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만큼 할로윈에 진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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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이 미국의 명절을 ‘점령’한 것은 케이팝데몬헌터스(케데헌)의 루미였습니다. 케이팝데몬헌터스는 한국의 아이돌이 주인공인 넷플릭스 애니메이션입니다. 3인조 아이돌그룹의 센터인 루미는 한복을 현대적으로 변형한 무대의상을 입고, 보라색 머리를 허리춤까지 땋아 내리고, 노리개같은 한국 장신구를 달고 있어요. 이런 루미가 미 전역의 학교며 동네 축제 현장 곳곳에서 목격됐다는 일화와 뉴스 보도가 쏟아졌습니다.

31일 할로윈 당일 저도 사는 사촌 조카들의 학교에 다녀왔어요. 코스튬을 입고 퍼레이드를 하는 행사를 한다고 하는데 응원도 하고싶고, 미국 학교도 체험해보고 싶고, 사탕도 주러! 예상은 했지만 정말 루미뿐이었습니다. 여자 조카가 다니는 사립학교에서는 한 반에 6~7명의 루미가 있었습니다. 퍼레이드 행사를 하는데 키와 피부색이 다른 루미 5명이 줄지어 걸어가는 것이 너무 귀여웠어요. 제 조카도 당연히 루미였습니다. 인근에 있는 남자 조카의 프리스쿨에서도 비슷한 광경을 봤어요. 곳곳에 루미가 있었고, 남자 아이들 중엔 케데헌의 남자 아이돌 그룹인 ‘사자보이즈’ 코스튬도 많이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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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팝, K드라마같은 한국 콘텐츠가 떠오르고 있다는 이야기는 최근 몇 년간 지겹도록 들었습니다. 그래도 막상 루미가 미국 할로윈 곳곳에서 보이니 신기했어요. 더 재밌는건 ‘K드라마의 할로윈 점령’이 이번이 처음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래 할로윈 파티를 재패했던 겨울왕국 엘사를 누른 것은 코로나 팬데믹 기간 ‘오징어 게임’이었습니다. 폭력적인 드라마인 오징어 게임 코스튬이 아이들 사이 유행하자, 이 코스튬을 금지한 학교가 유럽에서 나오기도 했지요. 별 생각없이 한국 드라마를 보고, 루미 코스튬을 입고, K팝을 따라부른 미국의 아이들과 젊은 세대는 무의식적으로 자연스럽게 ‘친한파’로 자랄 것입니다.

이뿐인가요. “한국인이다“라는 답 뒤에 따라오는 말은 더 이상 ”남이야? 북이야?“가 아닙니다. 대체로는 자신들이 인상깊게 본 한국 드라마의 나열입니다. ‘Parasite’(기생충), When life gives you tangerines’(폭삭 속았수다)까지도 괜찮아요. 옷가게 점원이나 신용카드를 만들어주는 뱅커가 ‘Mr Queen’(철인왕후)처럼 마이너한 드라마를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얘기가 길어집니다. 대체로 제가 영어로 번역된 제목을 못알아 들으니, 상대가 주인공은 누구고, 어떤 이야기이고, 슬프고, 시대적 배경은 어디다와 같은 부연 설명이 이어집니다. 설명하는 외국인들이 진짜 신나해요. 백악관의 대변인은 올리브영에서 한국어가 잔뜩 적힌 화장품을 인스타그램에 인증했고, 어디서나 한국 연예인의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실린 빌보드를 보게됐습니다. 어디서나 말조심을 해야하는 행복한 불편도 감수하게 됐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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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이 세계 무대에서 무언가를 하기 가장 좋은 시대임은 틀림없어 보입니다. 한국인이라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다른 사람들이 궁금해해주고, 말의 소재거리가 많으니 얼마나 편한가요! 심지어 AI의 발전은 언어의 장벽도 낮추고 있습니다. 정확하게 통계낼 순 없지만 미중 갈등의 상황 속에서 ‘한국인 선호’는 학교 기업 등에서 암암리에 보여지고 있어요. 다양성을 지키는 차원에서, 아시아인에 대한 암묵적 티오가 있는데, 현재 상황에서 같은 점수일 때 당연히 중국인보다 한국인을 선호하는 것입니다. 중국, 인도 등에 비해선 적지만 이곳 실리콘밸리에도 정말 많은 훌륭한 한국인들이 활동 중이고, 새로 유입되고 있어요. 그리고 다들 정말 멋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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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 할로윈에도 루미를 볼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루미는 사라지더라도 또다른 한국발 코스튬이 미국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어디에서나 보이던 루미처럼 ,세계 무대에서 활약하는 더 많은 한국인을 볼 수 있게 되길. 한국인 스타트업 중 유니콘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수백~수천억을 받고 이직하는 AI인재의 이름이 간체자한자가 아닌 한글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낙수 효과를 저도 좀 누리고 싶어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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