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淨水)

닫힌 시간의 흔적

by 강라마

왓 사켓 정상에서 내려다보니, 낯선 건물이 눈에 걸렸다.
하얗게 바랜 벽과 둥근 지붕, 기둥으로 지탱된 구조물.
멀리서야 그 전모가 드러나는 이곳은, 한때 도시의 심장을 맡았던 정수 시설이었다.


이제는 문을 닫은 지 오래다.
높은 벽은 시선을 막고, 내부는 방치된 채 간헐적으로 무료 급식소나 행사 공간으로 쓰일 뿐이다.
물을 길어 올리던 심장은 멈췄고, 건물만이 흑백의 풍경 속에 서 있다.


내가 오래 관심을 두었던 장소였지만, 막상 가까이 다가서면 그 존재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이렇게 높은 곳에 올라서야, 잊힌 구조물이 한눈에 들어왔다.
가까이 있어도 보이지 않던 풍경이, 멀리서야 비로소 드러나는 아이러니.


흐르던 물은 사라지고, 남은 것은 닫힌 시간의 흔적뿐이다.
나는 이 풍경 앞에서, 도시가 더 이상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를 잠시 내려다보고 있었다.

P1001222.jpeg <정수(淨水)> 2025.09 | Thailand_Bangkok | Copyright © llama.foto(JeongH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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