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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마루 Aug 14. 2022

인문학적 소양 『담론』

[지금은 새벽 두시 반] 제6화


"나와 너는 왜 친구가 될 수 없는 것일까?"의 근원을 찾아가 본다. 

왜 다를까? 원자로 구성된 인간이라는 같은 종인데? 뚜껑 한번 열어볼래? 이럴 때가 종종 있다.


인문학 (humanities)은 인간과 인간의 근원 문제를 다르고 그것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한 과학적인 연구를 하는 학문을 말한다. 소위 '문사철' 문학-역사-철학을 다룬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존 키팅 선생이 명확한 답을 준다.

"의학, 법률, 경제, 기술은 삶을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해, 하지만 시와 아름다움, 낭만, 사랑은 삶의 목적인 거야"

인문학적 소양이 왜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대사이다. 어떤 사람과의 대화를 할 때 인문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과의 대화는 항상 즐겁고 유연하게 흘러간다. 그것은 직업, 성별, 나이, 종교... 등과 상관없다. 하지만 '와~ 이런 고구마... 이 사람과는 영원히 친구가 안 되겠는데... 평생 안 보는 게 상책이야' 하고 느낀 경우도 많다. 그것은 담론의 인문학적 소양이 부족해 올바르고 과학적으로 이해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소설은 모두가 허구인데 뭐하러 읽냐'거나 '철학은 말장난이야' 라던지, '역사는 신의 섭리'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대화하면 고구마 얘기가 또 나올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과 친구가 될 수는 없는 것일까? 

'넌 인문학적 소양이 부족해'. '책 좀 읽어' 라 말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만 신영복의 담론에선 변화와 창조를 위한 매우 깊이 있는 관찰이 나온다.

'

변화와 창조는 중심부가 아닌 변방에서 이루어집니다.

중심부는 기존의 가치를 지키는 보루일 뿐 창조 공간이 못 됩니다.

인류문명의 중심은 항상 변방으로 이동했습니다.

오리엔트에서 지중해의 그리스 로마 반도로,

다시 알프스 북부의 오지에서 

바흐, 모차르트, 합스부르크 600년 문화가 꽃힙니다.

그리고 북쪽 바닷가의 네덜란드와 섬나라 영국으로

그 중심부가 이동합니다. 미국은 유럽의 식민지였습니다.

중국은 중심부가 변방으로 이동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변방의 역동성이 끊임없이 주입되었습니다.

그렇기에 변방은 공간적 개념보다 '변방성'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나 변방이 창조 공간이 되기 위해서는 결정적인 전제가 있습니다.

중심부에 대한 콤플렉스가 없어야 합니다.

콤플렉스가 청산되지 않는 한 변방은 결코 창조 공간이 되지 못합니다.

중심부보다 더 완고한 교조적(敎條的) 공간이 될 뿐입니다.

'

                                                         담론 21p

중심부에 대한 콤플렉스는 고정관념으로 해석할 수 있다. 보수의 생각으로 주류라 여기며 살아가면 결국 흐름을 따라갈 수 없다는 얘기다. 지금 당장 정치적 제도로 흐름을 막고 있지만 결국 나라도 다수의 긍정을 막아내지는 못 할 것이다. 


'환경운동'이라는 표현을 일례로 들었다. 인간이 과연 나무를 '환경'이라 부를 자격이 있는가? 나무에게는 오히려 인간이 환경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인식하는 '진리' 역시 별이 아니다. 억겁의 우주에 절대 진리가 존재하고 그걸 인간이 인식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그저 오만에 다름 아니다.


책에서 공부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공부는 삶 그 자체다. 한자로 공부(工夫)는 연장을 쓰는 성인 남자를 의미한다. 특히 장인 공(工) 자는 하늘과 땅을 의미하는 두 가로획과 이를 잇는 인간을 의미하는 세로획으로 이루어져 있다 즉, 공부는 삶인 동시에 세계를 인식하는 틀이다. 살아가는 것, 세상에 적응하는 지혜로서의 작은 공부와 세상을 사랑에 맞게 고치는 우직함으로써의 큰 공부, 두 가지 모두를 합쳐 공부라 한다. 그러니 자격증 시험을 위해 수험서를 읽는 일이나 대학원생의 논문 작업은 물론, 산골 목수의 망치질도 엄연히 당당한 공부인 것이다.


독서의 방법도 나온다. 

'책을 읽고 지은이를 읽고 자기 자신을 바라본다.'


쇠귀 신영복의 글은 캘리그래피로도 많이 만나볼 수 있다. 살아생전 온화하고 부드럽고 긍정적인 분이셨다. 오랜 감옥 생활도 원망하지 않았다. 어느 인터뷰에서 기자가 의도된 악의적 질문을 했을 때가 떠오른다.

선생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더 고차원에서 온화하게 답을 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런 여유로움은 더 깊은 성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미 많은 분들이 읽어셨겠지만 읽지 못한 분은 계시다면 가을이 오기 전에 읽어 보시길 추천드립니다.

그래야 우리에게 가을이 더 풍요롭지 않을까요?

 .

 .

덧말> 음악도 마찬가지 아닐까? 편견을 가지고 듣으면 변화와 창조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

한 때 언론에서 힙합을 저속한 흑인 음악이라 했던 적이 있다. 

물론 꼭 싫은데 다 들을 필요는 없다. 나도 물질만능주의 가사들이나 개개인의 디스는 싫다. 

비판하면서 골고루 가려 들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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