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구구절절

50. 만약

20170623_pm08:58

by 강민선

다른 삶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지금의 내가 아니라면 나는 과연 어떤 다른 삶을 살았을까. 만에 하나, 어떤 삶을 살 수도 있었을까. 지금은 오로지 남는 시간에 글을 쓰자!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버렸지만 만약 글이 아니라면. 사실 지금처럼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정말 최근이고, 그 전까진 신춘문예에 내겠다고 딱 공식적인 소설을, 그렇다고 공식을 제대로 지키지도 못하고 안 지켜서 멋지지도 않은 이상한 글을 썼을 뿐이고, 이처럼 자발적이고 능동적이고 내키는 대로 자유롭게 쓰기 시작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그럼 대체 나는 뭐하고 살았던가! 믿어지진 않겠지만 과거의 많은 날에 나는 혼자 있을 때면 음악을 틀고 노래를 따라 부르거나 거울을 보며 춤을 췄다. 내가 그랬다는 걸 아무도 모르는 이유는 꼭 혼자 있을 때만 그랬기 때문이다. 그것 때문에 집에 혼자 남게 되는 시간을 은근히 기다렸던 적도 있었다. 모두가 나가고 나면 안방 거울 앞에서 전축을 켰다. 그토록 비밀스러웠던 그 행위는 초등학교 때부터 시작해서 고등학교 때까지 꾸준히 이어졌다. 지금의 나를 알고 있는 사람들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거울을 보며 노래하고 춤을 출 땐 가상의 관객을 바라본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정말 그랬다. 이십 년도 더 지난 일인데, 이십 년이 지나고 나서야 그때 그랬던 내가 보인다. 눈앞에 가상의 관객을 두고 춤을 출 때면 정말로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세상에. 내가 그랬다. 자발적이고 능동적이고 내키는 대로 자유로웠던 그 시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가수가 되어야지, 춤을 춰야지, 뮤지컬이나 연극배우가 되어야지 라는 생각은 전혀 해보지 않았다. 그것은 적성이나 진로와는 별개인, 단지 놀이였고 쾌락이었다. 만약 그랬다면 어땠을까. 어느 날 내가 혼자 신나서 노래하고 춤추는 모습을 본 엄마가 어머, 너무 잘한다. 너 오디션 한 번 볼래? 라고 했다면 어땠을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중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우리 집에는 피아노가 있었다. 큰 이모 집에 있던 피아노를 치우면서 우리 집으로 가져온 것이다. 피아노를 제대로 배운 적도 없고 피아노 소리가 어울리는 화목한 집안 분위기도 아니었는데 집에 피아노가 있으니 어디서 보고 들은 대로 치게 되더라. 혼자서 마음대로 쳐 보다가 잊어버릴까봐 음표를 그려보다가 오, 이런 게 작곡인가 괜스레 의기양양해졌던 때가 있었다. 만약 그때 내가 그린 음표를 본 아빠가 너 음악에 소질이 있구나, 제대로 피아노 한 번 배워볼래? 했다면 나는 피아니스트 혹은 작곡가가 될 수 있었을까? 중학교에 올라가서 첫 미술 시간에 내 그림을 본 미술 선생님이 혹시 미술반에 들어올 생각 없느냐고 물었을 때 네, 미술반 들어갈게요! 미대 갈래요! 하고 덥석 그 손을 잡았다면 또 내 인생은 어디로 갔을까. 그땐 미술반=미대=화가라는 공식이 박혀 있어서 두려웠다. 중학교 때부터 대학에 갈 때까지 그림을 그려야 한다면 얼마나 지루할까 지레 답답해졌다. 미술 하려면 돈이 많이 들어간다는데 우리 집은 그런 돈 없는데. 이런 생각도 내 어린 마음에는 있었다. 넌 어린 애가 왜 그렇게 돈, 돈 하니? 라는 말도 잘 아는 언니에게서 들었던 것 같다. 그만큼 가난했다. 내가 가난하다는 걸 학교 선생님도 알고 친구들도 알고 동네 사람들도 다 아는 것 같았다. 왜 얘기가 갑자기 이렇게 흘러가나 싶은데 흐르는 대로 한 번 가보자. 어쩌면 내가 할 수도 있었을 몇 가지 중에 이런저런 이유로 다 걸러내고 남은 것이 글쓰기일지도 모르겠다.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도 않고, 돈도 안 들고, 장비도 필요 없고, 남 앞에서 떳떳하고, 하고 싶은 말은 언제나 많고. 이제는 거울을 보며 노래를 부르지도 않고 춤을 추지도 않는다. 더 작은 집으로 옮기면서 피아노를 버렸고 그 후론 피아노를 만져본 적도 없다. 작곡은 무슨. 그림은 가끔 낙서용으로 그린다. 한번은 제대로 낙서를 해보고 싶어서 드로잉북과 펜을 사기도 했는데 두어 장 그리다 말았다. 무슨 생각이 떠오르면 역시 글로 쓰는 게 빠르다. 펜으로 쓰든 핸드폰 메모장을 이용하든 어떻게든 생각을 빠르게 글로 옮기고 살을 붙이고 다시 읽는 시간이 즐겁다. 달리 할 게 없어서 시작한 일이었는데 이제는 그거야말로 나의 일처럼 느껴진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은 오로지 글뿐이다. 여행을 가는 것도, 어떤 새로운 공간을 만나는 것도, 그 낯선 공간을 나의 공간으로 장악하는 힘도 다 글쓰기로부터 생겨난다. 이거 뭐지? 글쓰기 찬양이 돼버렸지만 이렇게 해서라도 완전히 내 것이 되었으면 좋겠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내 삶의 모든 것들이 나만의 언어가 되어 자동반사적으로 툭툭 튀어나왔으면 좋겠다. 만약이라는 가정으로 시작된 글이 절대불변으로 끝나버리는 느낌이다. 지금까지의 내 인생을 돌아보면 많은 상황들이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바뀌어왔다. 그래도 글만은 매 순간 내 곁에 남아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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